쿠로다이 가운데생일 합작 모바일페이지 입니다.
黒大真ん中バースデーWebアンソロジーページであります。

쿠로오 테츠로의 생일 11월 17일과 사와무라 다이치의 생일 12월 31일의 중간이 되는 12월 9일인 가운데생일을 기념하여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黒尾鉄郎のお誕生日11月17日と澤村大地のお誕生日12月31日の真ん中の日である12月9日の真ん中バースデーをお祝うためたくさんの方から気持ちを送って下さいました。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각 작품의 상단에는 작가님의 트위터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作品ごと作者さんのTwitterが書いてあります。

재미있게 감상하셨다면 작가님에게 마음을 담은 피드백은 어떠실까요?
面白かったら心を含めて応援のメッセージはどうですか?


본 합작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으며 모든 창작물의 무단 기재 및 도용, 무단 공유를 금지합니다.
本合作の著作権は創作者にありますし、全ての創作物に対し、無断記載または無断盗用、無断共有を禁止します。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楽しく読んでください^^


합작에 대한 문의 사항은 언제든 트위터 @kurodai_habjak 으로 주시기 바랍니다.
企画についてご質問ありましたらツイッターでお願いします。

감사합니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신의 시간
w.꾸기미
@kkuk2me




 시간은 흘러간다.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신이라도 마찬가지. 시간은 다만 하나가 아니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귀속된다. 하나의 시간을 멈추면 다른 하나, 또 다른 하나, 그렇게 모두의 시간이 멈추고 세상이 멈춘다. 따라서 시간의 신이란 가장 무능력하고 가장 부질없는 자리. 시간의 신 쿠로오 테츠로, 여느 신들에게 늘 비웃음 사는 제 능력을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는 이유는,


*


 아, 태어났다.

 쿠로오는 시간을 읽는다. 누군가가 태어나는 시간을 읽어서 그 시간에 끼어든다. 모습을 바꾸고 누군가와 같이 성장하여 그를 위해 산다. 물론 매 시간마다 그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그가 태어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의 탄생을 앞당길 수도 없다. 태어나지 않아야 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고 원래 태어날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기다린다. 그가 태어나기를 가만히.

 이번에도 귀여운 아이로 자라겠구나. 이름은 무엇이 될까. 사와무라 다이치. 그래,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쿠로오는 가만히 웃는다. 긴 시간동안 너를 기다렸고 너는 찰나를 머무르다 가겠지. 그래, 그 찰나를 기다린 거야. 숨 쉬는 한 순간 아주 짧은 시간마저도 좋으니 너를 기다렸어. 사와무라 다이치가 성장할 때 까지 쿠로오는 또 기다린다. 언제 끼어들면 좋을까 생각하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사와무라를 지켜본다. 아장아장 기어 다니다 의자며 책상 다리에 머리를 받아도 울지 않는 동글동글한 아이가 어느덧 작은 두 발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고, 말을 배우고 학교에 입학하는 모든 것을 쿠로오는 지켜보았다. 사랑스러운 사와무라, 오래도록 기다린 나의 다이치.

 사와무라의 한 해 한 해는 쿠로오에게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시간과 같았다. 세지도 못할 만큼의 시간을 살았다. 세기를 포기한 만큼 너를 만났고 보냈다. 사와무라가 태어나면 쿠로오는 늘 딜레마에 빠진다. 사와무라가 살아가는 모든 1초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와 모든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해도 바로 옆에서 대화를 하고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는 기쁨 사이에서 고민한다. 망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려가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크는 너를 보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니 지금은 잠시 기다리자.

 사와무라의 18살 어느 날,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곁에 가기로 했다. 저번 생은 꽤 오래 기다려야 했던 탓에 참지 못하고 아주 어린 모습으로 내려가 너를 만났지. 이번 생은 진득하게 기다려 성인이 된 너를 만나러 가는구나.

 사람은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주어진 시간을 소진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시간이란 사람 한 명이 가진 짧은 수명이 아닌 한 생명에게 주어진 전체의 시간. 익숙하게 말하자면 환생―시간을 나누어 쓰는 것이라 정확히 말하면 환생은 아니지만―비슷한 것. 시간에도 각기 기운이 있고 색이 있어 쿠로오는 그 색을 읽어내는 것이다. 사와무라의 시간은 영롱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지. 저기에 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아이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처음 아닌 첫 만남은 늘 설렌다. 아,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자연스럽게 만나야 하는데. 사와무라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마음과 다르게 몸은 벌써 사와무라의 앞이다.

 “아, 저기…”
 “쿠로오?”

 쿠로오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사와무라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쿠로오?”

 사와무라가 다시 한 번 쿠로오를 불렀다. 그리고 대답 않는 쿠로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느리게 입을 열며 아? 하고 멍한 소리를 냈다. 본인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이름을 내뱉은 것이. 그럼에도 머리에 각인된 것처럼 꾹꾹 눌러 새긴 글씨로 가득 차는 이름 쿠로오 테츠로. 혀가 구르는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못해 익숙하다. 

 “오랜만이야, 사와무라.”
 “오랜만이긴 한데… 어디서 봤더라.”

 제일 최근에 만난 거라면 300년 전 쯤, 다른 나라에서. 쿠로오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웃었다. 이미 사와무라의 입에서 오랜만, 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부터가 이상했지만 더 말할 수는 없었다. 사와무라는 멍한 얼굴을 했다. 20도 즈음 꺾인 고개가 쿠로오를 향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쿠로오를 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상하게 너는,”
 “….”
 “그대로구나.”

 사와무라가 손을 뻗어 한 쪽 눈을 가린 쿠로오의 앞머리를 걷어내며 말했다. 드러난 이마부터 나른하고 날카로운 눈과 시원하게 뻗은 코, 긴 입술까지 모조리 훑는 시선이 느리고 다정했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동그란 눈 안에서 영롱히 발하는 사와무라의 시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와무라의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쿠로오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


 쿠로오는 사랑의 신을 알고 있다. 신들이 워낙 많기도 했고 쿠로오는 다른 신들과 만나려 하지 않으니―사와무라를 보느라 바빠서― 아는 신들이 많이 없긴 하지만 사랑의 신은 알고 있다. 그는 쿠로오를 좋아해 꽤 자주 쿠로오를 찾아온다. 쿠로오의 사랑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언제든 찾아와서 쿠로오가 사랑하는 시간이 태어나기를 구경하고 떠난다. 언젠가 그가 쿠로오에게 말했다.

 ―너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어. 그런 날이 없기를 바라지만 언젠가는 올 테니까. 네 사랑을 볼 수 있는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행운이야.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말을 이제야 추측하건대 그가 말한 선물이라는 것은 아마 사와무라의 기억일 것이다. 사와무라가 쿠로오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두 사람은 빠르게 감정을 공유했다. 억지스레 주입된 감정이 아니라 사와무라 스스로가 쿠로오를 보고 싶어 했고 만지고 싶어 했다. 네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네가 더 좋아져. 그래서 더 자주 부르고 싶어. 쿠로오 테츠로, 라고 열 번 즈음을 내리 불렀던 날 사와무라가 말했다.

 사와무라는 대학을 다녔다. 일문학을 공부하는 학부생이었는데, 시를 읽는 것을 좋아했다. 강의시간에 배웠거나 개인적으로 읽었을 때 좋아하는 시가 생기면 꼭 쿠로오에게 들려주곤 했다. 쿠로오는 그 시간도 좋아했다.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좋기도 했고 조곤조곤 시를 읽어주는 목소리나 시집의 어느 구절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시 좋았다. 사와무라의 모든 것이 좋았다. 마지막이니까 더 소중했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사와무라의 자취집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주로 사와무라에 대한 것이었다.

 쿠로오가 좋아하는 건 뭐야? 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 쿠로오는 난감했다. 쿠로오가 좋아하는 것은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것이다. 쿠로오는 잠시 망설이다 네가 좋아하는 모든 걸 좋아해, 하고 말했다. 사와무라는 재미없다며 웃으면서도 아쉬운 얼굴을 했다. 쿠로오는 좋아하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내 모든 기준은 너였는데 기준에서 벗어나려니 힘드네. 어느 날 쿠로오가 뜬금없이 던지는 말을 사와무라는 한 번에 알아듣고 쿠로오를 꼭 안아주었다.

 사와무라가 다리를 다쳤다. 가벼운 교통사고였는데, 운전 중 휴대폰을 사용하던 운전자가 신호등을 보지 않은 채 서행하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사와무라를 뒤늦게 발견했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브레이크에 놀란 사와무라가 피하지 못한 채로 앞 범퍼에 무릎이 받혔다. 차는 서행 중이었고 크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으나 차의 무게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와무라는 한동안 다리에 깁스를 대야 했다. 병원이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간 쿠로오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다이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살짝 부딪혔어. 그래도 한두 달은 깁스 하고 있어야 된대.”

 쿠로오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얗고 퉁퉁한 깁스붕대와 사와무라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울먹였다가 이를 갈다가 했다. 사와무라의 침대로 어느 사람이 다가왔다. 사와무라를 친 운전자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뱉어내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쿠로오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사나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쿠로오의 눈빛에 운전자가 더욱 미안한 얼굴을 하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쿠로오, 내 옆으로 와.”

 쿠로오는 운전자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사와무라의 말에 따랐다.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제 옆에 앉히고 그 어깨를 안아 다독였다. 쿠로오는 사와무라를 보았다가 등을 돌려 앉았다. 사와무라와 운전자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쿠로오는 사와무라를 보지 않았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운전자는 떠났다. 나 봐, 쿠로오. 괜찮아. 여직 돌아앉지 않는 쿠로오를 돌려 앉히고 달래는 목소리에 쿠로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속상해.”

 쿠로오는 이 말을 하고 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겨우 시간의 신이라서 널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뒷말은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무엇이 속상한지 묻지 않았다. 나을 때 까지 멀리는 놀러 못가겠다. 그냥 이런 말을 했다. 사와무라는 목발과 함께 병원을 나왔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가방을 대신 들고 어찌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잰걸음으로 사와무라의 주변을 돌았다. 그마저도 사와무라가 정신없을까 싶어 등 뒤만 배앵배앵 돌았다. 난생 처음 짚어보는 목발이 힘들어 사와무라는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그때마다 쿠로오는 더욱 안타까워했다. 이거 운동된다, 체력 길러질 것 같아. 장난스레 내뱉는 말에도 웃지 않는다. 이후에 사와무라가 두 번 쯤 더 멈춰 서서 숨을 골랐고 쿠로오는 바로 앞 골목에서 발을 돌려 골목 안으로 사와무라를 이끌었다. 중간중간 쉬긴 했지만 목발을 사용해 다리 외의 것으로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목 중반쯤에서 쿠로오가 멈추자 사와무라 역시 따라 멈추며 숨을 골랐다. 쿠로오가 뒤를 돌아 숨을 고르는 사와무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더운 숨과 온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쿠로오를 반겼다. 사와무라와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었는데도 사와무라는 익숙하게 쿠로오의 혀를 받아냈다. 시간은 해가 높이 뜬 밝은 낮이었고, 놀랍게도 골목에는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다. 우연일수도, 쿠로오를 좋아하는 사랑의 신의 능력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아프다는 건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참 무기력해지는 일이라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다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토해내고 만다. 그 마음은 어떻게든 전달될 것이다. 쿠로오가 뱉어내는 열기처럼 어떻게든 전달될 것이다. 호흡을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도 사와무라는 몇 번을 더 멈췄다. 그때마다 사와무라는 씩 웃으며 또 골목 없나? 하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까지 한 번 더 골목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지만 사와무라는 끝까지 물었다.

 사와무라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일이 바빠지며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했다. 같이 살 집을 고르고, 가구를 고르고, 새 집에 각자의 것들을 채워 넣을 때에도 싸울 법도 하건만 언성이 올라가는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싸운 적이 없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참는 일도 없었다. 불만이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느낄 때면 손을 맞잡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면 그걸로 일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몇 년, 일어나서 잠이 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은 대화를 하려던 두 사람이 3일 간 대화를 단절한 일이 있었다. 발단은 몇 통의 전화였다. 업무상의 전화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개인적인 전화는 굳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전화를 받았던 사와무라가 쿠로오의 눈치를 보더니 아예 집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고 들어오는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일? 하고 묻는 쿠로오의 물음에도 사와무라는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 할 뿐 무엇인지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하루는 참다못한 쿠로오가 통화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사와무라를 앉히고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사와무라는 망설이지 않고 쿠로오에게 휴대폰을 주었다. 쿠로오가 달리 사와무라의 휴대폰 통화내역이나 문자를 검사하기 위해서 그의 휴대폰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한 손에는 사와무라를 닮은 단단하게 각진 휴대폰을 꼭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사와무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슨 전화야?”
 “부모님이야. 안부 전화.”
 “다이치, 사실대로 말해줘. 무슨 전화야.”
 “정말 부모님이야.”
 “그러니까, 무슨 내용의 전화냐고.”
 “테츠로.”

 나직이 이름만을 부르는 것은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쿠로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러설 수도 있었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다이치. 쿠로오 역시 사와무라의 이름을 말했다. 침묵이 가라앉았다. 사와무라는 입술을 달싹이다 마침내 말을 뱉어냈다.

 “…결혼 언제 하냐고,”
 “….”
 “그냥 그런 전화야.”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는 얼굴이 속상했다.

 “왜 말 안했어.”
 “별 수 없잖아. 괜히 신경 쓰이게 할 테고.”
 “다이치. 그건 이유가 안 돼. 그리고 내가 묻지 않았으면 계속 말 안 했을 거라는 말이잖아.”
 “그야 이건 우리 부모님의 개인적인 욕심이고, 이런 이야기 했다가 매번 전화 올 때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하는 얼굴은 보기 싫으니까,”
 “다이치.”
 “…알아, 미안해.”

 쿠로오가 말을 이어받기도 전, 사와무라가 숨을 고르더니 제 말을 계속했다.

 “본가에 한 번 갈까 해.”
 “그래, 다녀와.”

 이야기하던 주제에서는 조금 어긋난 말에도 쿠로오가 동의를 표하며 잡고 있던 사와무라의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다정한 손길에 사와무라가 잡혀있는 제 손을 보았다가 고개를 들고 쿠로오와 진득이 눈을 맞췄다.

 “결혼 안 할 거라고 말하려고.”
 “….”
 “…같이 갈래?”
 “무슨 이유 때문에 안 한다고 말하려고?”
 “말해야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라 부모님이 원하시는 결혼은 평생 못 할 거라고.”
 “그러지마, 다이치.”
 “괜찮아.”
 “부모님이 널 안보겠다고 하실 지도 몰라.”
 “응, 괜찮아.”
 “안 돼.”
 “테츠로.”
 “그건 안 돼.”

 사와무라가 인상을 썼다. 쿠로오의 손 안에서 사와무라가 주먹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쿠로오는 언젠가의 시간을 떠올렸다. 가족에게 내쳐져 오로지 서로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힘들다고도 했었다.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는 가족의 소식을 들으며 쓰게 웃던 기억이 있어 쿠로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어 안 된다고 했다. 다 가질 수는 없어,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버릴 수 있어. 네가 제일 소중하니까. 언젠가의 시간이 말했었다. 그 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음을 쿠로오는 후회한다. 어째서 버리는 것은 늘 시간들의 몫이어야 할까. 자신의 사랑 하나를 위해 몸 하나만을 들고 내려온 쿠로오가 버릴 수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없는데, 그의 시간이 쿠로오가 바라고 가진 모든 것인데 어찌하여 시간은 쿠로오를 위해 시간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하는가. 그럼에도 어찌하여 쿠로오는 그를 말릴 수 없었는가.

 “다 가질 수는 없어, 테츠로.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다이치.”
 “….”
 “그러지 마… 더는 버리지 마.”
 “…테츠로.”
 “….”
 “지금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손을 놓는다. 그리고 일어선다. 쿠로오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바닥과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다가오는 사와무라의 팔이 보였다. 쿠로오는 눈마저 감아버렸다. 사와무라는 사와무라다. 쿠로오가 이전에 만났던 시간이 아니다. 사와무라에게 버림은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이전과 같은 결과일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쿠로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와무라를 스쳐 걸었다. 사와무라가 쿠로오의 팔을 잡았으나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사와무라의 손을 풀어내고 쿠로오는 집을 나갔다. 세 시간 뒤에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친 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사와무라 나름대로 말을 아꼈다. 단단하게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더는 버리지 말라고 하던 쿠로오가 보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3일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말을 꺼낸 것은 사와무라였다.

 “오늘 본가에 갈 거야.”
 “……….”
 “테츠로.”
 “…가지 말라니까.”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쿠로오가 말했다. 쿠로오의 등만이 사와무라와 마주했다. 사와무라는 쿠로오의 등을 보고 앉았다.

 “버리는 거라고 하지 않을게.”
 “….”
 “난 너를 선택한 거야. 내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네가 괜히 눈길을 거두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명절마다 본가에 갈 때 너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더 시간이 지나서 부모님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네가 쓸쓸한 웃음을 짓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너를 보는 건 내 불행이니까, 미래의 너와 나를 위해서 선택한 거야. 미안해, 내 단어 선택이 나빴어. 버린 게 아니야.”
 “….”
 “나 봐 줘. 지금 가면 적어도 이틀은 못 볼 텐데 너무 보고 싶으면 어떡해. 얼른.”
 “….”
 “삼일동안 손도 못 잡았어. 얼른 잡아줘.”

 쿠로오가 뒤 언저리를 흘끗 보더니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큰 손바닥 위에 사와무라의 손이 턱하니 얹혀졌다.

 “이제 안아줘야지.”
 “…뻔뻔해.”
 “안 안아 줄 거야? 우리 삼일동안 손도 못 잡고 안지도 못했는데?”
 “이리와.”
 “네가 와, 바보야.”

 쿠로오는 손을 잡은 채로 대답을 않다 몸을 휙 돌려 앉았다.

 “한 번은 좀 져 줘.”
 “내가 왜?”
 “나도 져줬잖아.”
 “본가 가는 거?”
 “그래.”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였는데.”
 “다이치!”

 사와무라가 배실 웃으며 팔을 벌렸다. 쿠로오는 뚱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쳐다보았고 사와무라는 손가락 끝으로 제 가슴 위쪽을 두 번 톡톡 치고 다시 팔을 벌렸다. 쿠로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사와무라의 허리를 안았다. 사와무라는 4일 뒤에 돌아왔다. 말갛게 웃으면서 ‘엄마 손 맵더라. 등에 멍들었어.’ 말했다. 쿠로오는 사와무라를 안아주었다.

 “아버지는?”

 귀 바로 옆에 쿠로오의 목소리가 닿았다.

 “짐 챙겨서 나오는데 또 등 맞기 싫으면 한동안 집에 오지 말라고만 하셨어.”
 “그래, 잘했어. 그거면 됐어.”

 정말로 그거면 되었다고,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의 선택이라면 그걸로 되었다고.


*


 오랜 시간 함께였다. 운동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주름도 무시할 수 없었다. 햇살 좋은 아침 볼에 남은 베개자국이 일어난 지 꽤 되어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너도 많이 늙었어.’ 했다. 최신곡이라고 하는 노래들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고 새로운 기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늙어갔다. 건강하던 머리카락이 하나둘씩 빠지는 걸로도 모자라 하얗게 세었다. 그러는 동안 쿠로오는 아침에 일어나 꼬박꼬박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얼굴도 조금씩 바꿨다. 매일 함께 늙어갔다.

 새하얀 백발의 어느 날, 사와무라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했다.

 “너는 정말로,”
 “….”
 “그대로구나.”
 “….”
 “어떤 모습이든, 어느 나이든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야.”

 그 어느 시간이든 사와무라는 쿠로오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쿠로오에게 묻지 않았지. 너는 무엇이냐고. 무엇이기에 나를 찾아왔으며 나는 어째서 너의 매 순간을 기억하고 있고, 외모는 함께 늙어가면서도 어떻게 네 체력이나 힘만은 여전하냐고.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은 쿠로오가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다음이 없는 마지막.
 쿠로오는 자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와무라를 따라한 나이든 얼굴이 아닌 언제까지고 젊은 신의 얼굴. 사와무라는 제 눈앞에서 노인이 20대 청년이 되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이야, 다이치.”
 “나만?”
 “아니. 나한테도.”
 “그렇구나.”
 “….”
 “외롭겠다, 테츠로.”
 “외롭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 하지만,”
 “….”
 “오래도록 외로웠으면 좋겠다.”

 나를 그리워하면서, 오랫동안. 

 사와무라가 덧붙이는 말에 쿠로오는 제일 처음 싸웠던 어느 과거처럼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두 가지를 사와무라는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을 그리워했으면, 살아서 잊지 않고 자신을 그리워했으면. 외로웠으면, 오래도록.

 사와무라 다이치가 마지막 시간을 등지고 떠난 뒤 쿠로오 테츠로는 꽤 오랜 시간 그를 그리워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에 수많은 시간의 더미들을 등지고 앉아 울었다가, 시간의 더미를 헤집어 사와무라의 시간을 찾았다가. 사와무라의 시간은 이제 없다. 사와무라가 놓고 간 바람이 있어 쿠로오는 사와무라를 잊지도, 이 자리를 떠나지도 못했다. 그의 바람대로 오래도록 그리워하며 외로워하며. 제일 마지막에 만난 만큼 사와무라는 강렬했다. 쿠로오를 기억한 것 역시 그랬다. 그 결과 사와무라는 시간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이제껏 쿠로오가 만나온 하나의 시간 중 그 시간이 ‘누구’라고 정의내릴 수 있었던 적은 없었으나 이제는 가능했다. 쿠로오가 정의내린 유일한 주인.

 쿠로오의 외로움은 길다. 얼마나 더 길어질지 알 수 없다. 다만 자연스레 쿠로오의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사와무라의 바람대로 오래도록 외롭게. 사와무라를 그리워하며 오랫동안.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날Nal  (0) 2016.12.09
[소설] 노릉쟈  (0) 2016.12.09
[소설] 런비  (0) 2016.12.09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사랑하는 당신에게.
w.날Nal
@NAL_IVAL





 “눈이네.”

 올해 들어 처음 맞이하는 첫 눈에 빨래를 널다 말고 사와무라는 잠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이르게 찾아온 눈이 반갑지만 누군가를 떠올리니 그저 쓴웃음만이 터져 나온다. 온 몸을 둥글게 움츠린 채 내리는 눈에 질겁하며 걸을 쿠로오가 눈앞에 선연하다. 차라리 쌓여버리면 오히려 더 괜찮을 텐데 이렇게 녹아내려 물이 되는 걸 보니 불쾌지수가 더 하리라.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에 꺼내도 빠르겠다 했는데 오늘 일찌감치 코타츠를 꺼내놔야겠다 마음먹은 사와무라는 다시 내려둔 빨래를 집어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날이 좋았는데 눈이라니. 오늘은 뜨끈한 국물에 역시 따끈하게 데운 사케 그리고 사와로 저녁을 할까? 평소라면 아저씨스러운 메뉴라고 핀잔을 할 쿠로오도 오늘은 말없이 찬성하리라.
 사와무라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겨울에는 한없이 취약해지는 쿠로오와 달리 설국 출신인 사와무라는 그 어떤 계절보다 생생했다. 딱히 미야기에서 자고 나라지 않았더라도 겨울을 가장 좋아했겠지만. 만질 때마다 손가락으로 스며드는 그 생생한 차가움이 마음에 든다. 이것도 체온이 높아서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쿠로오는 체온이 다른 사람보다 차갑다. 그래서 더 달라붙는 거기도 하지만. 이건 절대로 쿠로오한테 말하지 말아야지. 혼자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사와무라는 빨래 널기를 끝내자 열어둔 창문을 닫았다. 환기 시키느라 열어뒀더니 어느새 방안 온도가 제법 내려갔다. 5시 15분. 사십분 정도 지나면 쿠로오가 올 때가 됐다.

 “코타츠가 어디 있더라?”

 베란다 한 켠에 마련한 정리대에 차곡차곡 쌓아둔 상자를 유심히 살펴보며 작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역시 이번에 대대적으로 상자도 바꿔야겠다. 매번 네임택을 쓰고 붙이는 게 귀찮아서 설렁설렁 넣어뒀더니 바로 기억나지 않는다. 코타츠는 큰 편이라 그래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나머지는 아니니까. 내일 마트에 불투명한 정리함을 구매해야겠다 마음먹으며 사와무라는 맨 위에 있는 코타츠를 꺼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정리대는 꽤나 높아서 물건을 쌓아두면 사와무라가 손을 힘껏 뻗어야 했다.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수월하게 꺼내는 건 쿠로오뿐이다. 안전을 위해 의자를 가져와 상자를 내린 사와무라는 살짝 열린 틈새 사이를 살폈다.

 “오, 좋아.”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찾은 사와무라는 생글 생글 웃으며 상자를 거실로 들고 나왔다. 소파에 잠시 기대놓고 베란다에 있는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돌린 사와무라는 다시 긴 상자 앞에 섰다. 둘 다 일본 표준 체형은 아닌지라 커다란 걸 샀더니 코타츠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코타츠 담당은 추위를 많이 타는 쿠로오의 몫이라 사고 나서 혼자 설치해보는 건 처음이다. 이런 일에도 역시 기럭지가 중요한 건가. 힘은 자신이 더 센데 아주 거뜬하게 코타츠를 설치하던 쿠로오를 떠올린 사와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코타츠도 내놨겠다…, 아! 저녁거리 체크해야지.”

 코타츠가 잘 작동되는지 테스트 하느라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사와무라는 으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타츠의 마력에서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말과 달리 쉽게 벗어난 사와무라는 냉장고를 열었다. 음식다운 음식으로 식사하기가 지론이라 기본적인 식재료들은 부족하지 않다. 물론 쿠로오가 좋아하는 꽁치 같은 어패류는 신선도를 위해 그 날마다 구입했다.

 “나베에 들어갈 야채는 있고…, 오뎅만 다른 종류로 몇 개 사면 될까?”

 핸드폰을 들어 꼼꼼하게 살 걸 적은 사와무라는 결국 마지막에 꽁치를 추가했다. 생선을 먹는 날은 일주일에 세 번이고, 이번 주는 이미 그 횟수를 다 사용했다. 추위로 인해 물에 젖은 고양이마냥 축 늘어졌을 쿠로오를 위해 예외로 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쿠로오를 위한 날이니까.

 “그럼 마중이나 나가볼까.”

 커다란 우산과 함께 장바구니를 집어든 사와무라는 붉은 색의 야구잠바를 입고 대충 스니커즈를 구겨 신은 채 집밖을 나섰다.


*



 습기를 머금자마자 평소보다 더 늘어진 머리에 쿠로오는 한숨을 겨우 집어 삼켰다. 신장 탓에 퇴근 시간의 전철에서 숨을 쉬었다가는 자칫 모를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재택근무 하는 사와무라가 세상 부러울 수가 없다. 히터로 인해 기분 나쁠 정도로 뜨거워진 공기와 꽉꽉 들여 찬 사람들 때문에 사와무라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전철에 내려서 떠올릴 걸. 그러면 뛰어가기라도 할 텐데 아직 도착하려면 십오 분이나 남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별거 아닌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 쿠로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내가 저녁 당번이었지?’

 지친 얼굴로 가면 분명 사와무라는 걱정스런 눈으로 보다 자기가 한다고 할 거다. 같이 살면서 반드시 집안일은 절반으로 나눠서 하자고 했는데 어째 사와무라가 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어차피 자기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괜찮다고 하지만 쿠로오는 사와무라가 혼자 끌어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택근무라고 일이 쉬운 것도 아니고 일하는 건 누구나 똑같다.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쿠로오의 어깨가 축 쳐졌다.
 내릴 때는 그래도 웃는 얼굴을 해야지. 사와무라 떠오를 동안 어느새 도착한 역에 쿠로오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내려섰다. 숨을 들이키자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녹아내린다. 여전히 눈은 내렸고, 심지어 아까보다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올 때 편의점에라도 들릴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옆에 든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던 참이었다.

 “다이치?”

 핸드폰에 떠오르는 건 방금 전까지 절실하게 떠올렸던 상대의 이름이었다.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누른 쿠로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야?]
 “방금 내렸어.”
 [오! 발견했다. 거기 서 있어, 테츠로.]
 “어?”

 곁을 스쳐지나가는 인파들 속에서 눈에 익은 붉은 잠바가 손을 쑥 내밀었다. 마트에라도 들렸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사와무라가 쿠로오를 향해 걸어왔다.

 “좋아. 딱 맞게 도착했네.”
 “기다린 거야?”
 “아니, 막 도착했어. 출근할 때 우산 안 들고 나간 거 같아서 마중 나왔지.”
 “…다이치!”
 “왁! 계란 들어 있어, 조심!”

 조금 울 것 같다. 마트를 핑계로 마중 나온 사와무라가 귀여워서,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의 옷을 입고 나타난 그가 너무 예뻐서 당장이라도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적어도 일주일 도안은 각방 신세일 거다. 최대한 충동을 내리 눌러 포옹으로 대신한 쿠로오는 사와무라가 뭐라 하기도 전에 우산을 뺏어 들었다.

 “나도 너 씌워주는 거 정도는 할 수 있거든.”
 “계란 들어 있다며. 양손 다 들고 있다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그리고 다이치, 너 신발….”
 “미안. 그냥 보이는 대로 신고 나왔어.”
 “동상 걸릴까봐 그렇지.”
 “이정도로 걸릴 리가.”

 지적이 아니라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데요, 사와무라상?!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크게 외친 쿠로오는 살짝 사와무라가 있는 쪽으로 우산을 숙인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철을 타고 내릴 때만해도 우울했던 마음은 온통 사와무라를 보자마자 맑아졌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상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으로 둘러싼 채 마중 나온 일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세상 싫었던 눈이 더 이상 쿠로오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은 추우니까 오뎅나베랑 튀김.”
 “오, 그거 좋네.”
 “그리고 아침 일찍 백화점에 가야할 것 같아.”
 “뭐 사야할 거 있어?”
 “베란다에 있는 정리함 다시 사야할 것 같아. 코타츠 찾느라 좀 고생했어. 안이 안보이니까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더라. 투명은 그렇고 반투명으로 살까하고. 일하느라 피곤하겠지만 내일 잠깐만 시간 내주라.”
 “이 정도로 피곤할 리가 없잖아.”
 “연말이라 슬슬 바쁠 거 다 알고 있거든.”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에 쿠로오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역에서 집이 가까워서 참 다행이야. 어느새 들어선 동네 골목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쿠로오는 그대로 우산을 쓱 내려 앞을 가렸다.

 “테츠…!!”
 “아까부터 참았으니까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다이치상?”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을 내리누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혀를 핥으며 잇새 사이로 살짝 들어갔다 멀어지는 쿠로오에 사와무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집 앞 아니었으면 한 대 때렸을 지도 몰라. 바로 그 점을 노린 거랍니다. 쿠로오—. 테츠로겠지요, 다이치상. 생글 생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쿠로오가 얄밉지만 눈동자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는 피곤함에 사와무라는 결국 허용하고 말았다. 두 눈 가득 자신을 담아내고 있는 남자에게 더 뭐라 말하리. 먼저 냉큼 현관에 올라서서 기다리는 쿠로오를 향해 피식 웃으며 사와무라는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를 꺼냈다.


*



 미지근한 온도의 물이 담겨져 있는 욕조에 쿠로오는 뽀글뽀글 숨을 내뱉으며 머리끝까지 잠수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부지런하게 장을 봐온 것들을 꺼내는 사와무라를 지켜보다 그대로 소파에서 선잠이 들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놀라 움찔거리며 눈을 떴을 때는 삼십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마침 깨우려 했는데 알아서 일어났네 하고 말한 사와무라는 쿠로오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씻고 나오면 다 준비될 테니까 몸 푹 담그고 나와. 평소 고양이처럼 빠르게 샤워하는 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긴 말에 쿠로오는 허물 벗듯 정장을 벗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딱 자신이 좋아하는 온도의 물이 담긴 욕조에 그제야 정신이 든 쿠로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만 살짝 내밀고 고마워 라고 작게 말하자 낮은 사와무라의 웃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사와무라에 배려에 응석을 부리며 욕조에 멍하니 있기를 다시 삼십분.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피곤에 쿠로오는 팔을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일어났다. 물에 젖은 머리를 흔들며 수건으로 가볍게 털어낸 쿠로오는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딱 맞춰서 나왔네.”

 이미 코타츠 위에는 모든 저녁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막 인덕션 위로 냄비를 올리던 사와무라가 손을 떼며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렸다. 물기가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쿠로오에 사와무라는 풋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주방 앞에 섰다.

 “테츠….”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알아.”
 “그 이전에 할 말이 있지 않아?”
 “오늘 대신 저녁 준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등 뒤에서 쑥 뻗은 팔이 사와무라 대신 찬장에 올려둔 맥주잔을 꺼냈다. 얼굴을 살짝 뒤로 젖히며 어서 주지 않고 뭐하냐며 손을 내미는 사와무라에 쿠로오는 씨익 웃었다.

 “!”
 “내가 들을게.”

 뭐라 하기도 전에 쿠로오는 너무 자연스럽게 사와무라의 입술 위로 쪽하고 키스했다. 뒤늦게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이마에 닿는 두 번째 버드 키스. 앞 접시와 젓가락을 담은 트레이를 대신 집어 든 쿠로오는 잽싸게 사와무라에게서 멀어졌다.

 “오늘 내 두 번째 생일이라도 되는 걸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

 노릇노릇하게 익은 꽁치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쿠로오에 사와무라는 결국 찌푸린 미간을 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로 주말에는 뭐든 시켜주세요.”
 “짐꾼을 자처하는 겁니까, 테츠로상.”
 “오늘은 내 두 번째 생일인거 같으니 주말은 다이치의 두 번째 생일 해야지.”

 기분 좋게 휘어지는 눈동자에 마주하는 사와무라의 눈동자 역시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내일 일찍 쇼핑을 하고 들어오면 주말 내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까? 가끔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함께 뒹굴 거리며 늘어지는 시간도 좋겠지. 앞 접시 가득 나베를 담아 내미는 쿠로오를 보며 사와무라는 내일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짝 시선을 던진 창문 밖에는 여전히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올 해도 어김없이 쿠로오와 함께 맞이하는 열 번째 첫 눈의 밤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꾸기미  (0) 2016.12.09
[소설] 노릉쟈  (0) 2016.12.09
[소설] 런비  (0) 2016.12.09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w.노릉쟈
@holdens_s2





  첫눈이 내렸다. 쿠로오는 당연하게도 다이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이치가 눈이 오는 것을 유독 좋아하기도 했고, 몇 년 전 첫 눈이 내리는 날 쿠로오가 다이치에게 고백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와무라, 눈 내리는 거 봤어?"
  - 응, 오더라.

  다이치의 반응이 이상했다. 첫눈이 오는 날이면 으레 쫑알쫑알 서로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인데, 목소리가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쿠로, 그만 집에 가자."

  켄마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다이치에게 양해를 구한다. 신칸센에 타야해서 나중에 전화할게. 작은 대답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집으로 가는 내내 쿠로오는 다이치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두운 방안, 다이치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밝게 빛나는 액정에는 테츠로라는 글자가 써있었다. 몇 번이나 진동하다 꺼지길 반복하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다이치는 이내 이불을 덮어쓰고 전화를 무시했다. 


  다이치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쿠로오는 전화 걸기를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고민을 하다 선잠이 들었을 때쯤이었다. 짧게 울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다이치의 지정 신호음. 쿠로오는 몸을 벌떡 일으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 주말에 도쿄에 못 갈 것 같아.

  발신 시각 오전 3시 48분. 쿠로오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왜? 의문이 가득 담긴 문자였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쿠로오는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쿠로오는 꾸준히 다이치에게 연락을 했지만 다이치는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쿠로오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걱정도 되었다. 제가 아는 다이치는 절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관계를 끝낼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견디다 못한 쿠로오는 토요일 아침, 미야기행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쿠로오는 평소 이동할 때는 잠을 자는 편이었지만, 두 시간 정도의 여정동안 다이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불안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이라기엔 이른 시간쯤에, 쿠로오는 다이치의 집 앞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방문했던 다이치의 집은 몇 주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쿠로오는 거침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다이치의 부모님은 주말에도 일을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 쯤 초인종을 눌렀을 때 인터폰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쿠로. 문 열어줘. 간단한 대화가 오갔고, 곧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직접 열어준 다이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안색이 좋지 않았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신발을 벗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온 쿠로오가 다이치에게 물었다. 다이치는 쿠로오의 시선을 외면했다. 쿠로오가 다이치의 팔을 붙잡았다. 

  "방에 올라가 있어. 곧 올라갈게." 

  쿠로오의 팔을 떼어낸 다이치는 2층으로 쿠로오를 올려보냈다. 쿠로오는 역시 익숙한 다이치의 방바닥에 앉았고, 곧 다이치가 주스와 작은 비스킷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은 쿠로오는 다이치를 제 앞에 마주보고 앉게 했다. 다이치는 여전히 쿠로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사와무라, 나랑 눈 마주쳐봐."
  "......"

  다이치의 얼굴을 붙잡은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게 했다. 쿠로오와 눈이 마주친 다이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곧 눈물이 다이치의 볼을 타고 흘렀다. 한동안 둘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다이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예상했겠지만,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다이치는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학교 체육관에서 연습을 마치고 나왔는데 누군가에게 맞아서 창고로 끌려갔다는 이야기, 거기서 눈이 가려진 채 누군가에게 몸이 더듬어졌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이치의 몸이 가늘게 경련했다.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다이치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다이치가 일어나더니 방안의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다 쓴 휴지, 부러진 연필심, 고장난 볼펜. 그리고 쿠로오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떨리는 손으로 쿠로오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두 줄. 쿠로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이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누군지 알만한 단서가 전혀 없어?"

  다이치가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나는 것은 목소리가 낮은 편이였고, 체격도 제법 컸다는 것. 그것뿐이라고 말을 했다. 일을 크게 벌일 수 없어 그냥 묻어버리려고 했다는 것, 임신하지 않았다면 쿠로오에게도 말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다이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낙태는 생각해 봤어? 쿠로오는 제가 말해놓고도 낙태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지나치게 무거워 놀라고 말았다. 다이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네가 만약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정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다는 말이야. 하지만,"

  네가 힘든 걸 원하지 않아. 겨우 착상된 수정란일 뿐이잖아. 잘 생각하고 결정해보자, 사와무라. 울음을 겨우 멈췄던 다이치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다이치는 쿠로오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고 쿠로오는 다이치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 내렸다.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쿠로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범인을 찾아내서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눈빛이었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꾸기미  (0) 2016.12.09
[소설] 날Nal  (0) 2016.12.09
[소설] 런비  (0) 2016.12.09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w.런비
@jin_ren____





 [형.]
 [형이라고 해주세요.]

 휴대전화의 화면 위로 쏟아지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는다. 생일이 한 해의 말일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생일이 빠른 사람들에게 질리도록 들려왔던 소리였다. 우리는 벌써 햇수로는 육년, 한 달여를 남겨 두고 정확히 5주년을 맞이하고 있었으나 네게서 ‘그런’소리를 듣기 시작한 지는 벌써 손 하나가 부족할 만큼의 햇수를 가진다. 그러나 너는 참 매 년 질리지도 않고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해 온다. 심지어 이번 에는 선물도 괜찮으니까 불러달란다. 참, 그렇다. 이쯤 되니 정말 불러줘야 하나― 싶은 거였다.

 딱히 기념일이라고 챙길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서로의 생일만큼은 제대로 챙기자. 

 그게 우리 둘 사이의 약속이었다. 왼손 약지에 반지 끼고 산다는 사람들 모두 챙긴다는 백일, 이백일, 1주년 그런 걸 대놓고 챙길 수 없는 것은, 물론 우리 둘이 남남 커플인 탓도 한 몫 했으나 우리 둘 다 언제부터 정확히 ‘사귄다’의 개념 아래 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같은 운동을 하다 보니 자주 만났고 자주 만나다 보니 자주 밥을 먹었으며 의외로 서로의 고민이나 생각 등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연락이 잦아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흘렀고 같이 성년을 맞이했고 술 한 잔을 부딪치다 보니 술김에는 아니었으나 배도 맞대고 있었다. 

 그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쿠로오의 생일과 나의 생일 그 중간지점 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말고사가 끝났던가, 아니던가. 타 지역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에 머물던 나의 자취방에 둘이 한창을 뒹굴다가 아마 네가 라면을 끓여왔던가, 아니던가. 둘 다 속옷하나를 걸쳐 입고 서로의 시험기간이 어긋나 길게 늘어지는 바람에 오랜만에 뒤엉킨 탓에 욱신거리는 엉덩이에는 방석도 부족해서 베개까지 깔고 앉아서 너는 냄비뚜껑에, 나는 종이컵에 라면을 받쳐 먹다가 네가 했던 말이 있었다.

 “야.”
 “왜.”
 “우리 왜 자냐?”

 후루룩. 너는 멀쩡히 라면을 삼켰으나 나는 그 말에 매운 기라고는 하나 없는 소유 라면이 거세게 사례 들릴 뻔 한 것을 가까스로 넘긴다.

 “…글쎄다.” 

 네 시선이 금색 양은냄비 바닥에 꽂혀있었다. 퉁퉁 뿔은 라면 면발과 함께 뽀얀 바닥을 드러낸, 그 양은 냄비의 바닥에. 금방이라도 그 냄비 뚜껑위로 얼굴이라도 박을 양 가까이 대고 있던 네가 문득 나를 보았다. 

 “사귈래?”

 나는 그걸 보고 허탈해 졌다. 도대체 우리가 여태껏 사귀지 않은 거였다면 뭘 한 건데? 싶었으나 네 퍽 진지한 모습에 아무런 대꾸도 하고 있지 못했다. 그저 그 때 라면 냄새가 진득하게 묻은 키스가 세기도 힘들 만큼 몸을 섞어온 너와 나눈 첫 키스였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시간이 흐른 뒤에, 늦게, 얼마간 시간이 지났던 때에 괜히 그 날의 생각이 떠올라서 네 뒤통수를 갈겼더랬다. 


*



 올 해의 네 생일은 벌써 그런 너와 함께 맞이한 네 번째 생일이었다. 네 생일을 보내고 난 뒤에 ‘사귀자’고 했으니, 정확했다. 십대의 후반에 만난 우리는 벌써 이십대의 후반을 향해 착실히 달려가고 있었으며 교복과 운동복을 걸쳤던 우리는 같은 운동복이라도 조금 더 이름 있고 조금 더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걸치게 되었다. 그렇게 변해가는 동안에 너와 나의 관계에는 우습게도 별 다른 이상전선 없이 ‘상열지사’라고 할 법한 일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걔, 그러니까 쿠로오와의 관계를 밝힌 몇 안 되는 주위 사람들은 종종 너와 나를 두고서, “나는 너희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날 줄은 몰랐어. 하고 이야길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소소하게 지인들을 모아 너의 생일 파티를 보낸, 네 생일의 전날 밤 나란히 누워 이야길 했었다. 왤까. 나는 너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나도. 둘 다 같이 운동을 좋아하는 생활 패턴도, 필요 적절할 때에 서로에게 양보하고 맞춰 주는 습관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내뱉는 말들도 하물며 잠자리에서 좋아하는 체위며 속궁합까지 다른 사람은 내 인생에 없겠구나― 싶을 만큼 잘 들어맞는 게 우리 둘인데.

 [애인아]
 [애인님아]
 [형이라고 불러주세요.]

 불림 받고 싶어요. 연거푸 이어지는 진동음에 웃음이 터진다. 그렇게 귀찮은 양 느끼면서도 이렇게 애교를 떨어대는 걸 보면 귀여워 솟아오르던 짜증도 금세 그 기세를 꺾어 웃게 만들고 만다.

 “그러게 소원권 썼으면 좋잖아.”

 그걸 썼어도 네 생떼를 들어 줄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둘 다 참 바보 같지, 매년 생일 때 마다 서로에게 주어지는 ‘소원권’은 꼭 허투루 써버리고 만다. 유치하고 찬란하게도 매일 해 대는 뽀뽀해 주세요- 라거나 안아주세요-와 같은 아주 사소한 소원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건 쿠로오만을 바보 같다 지칭할 순 없는 문제였다. 나 역시 분명 지난해에도 시달린 정도가 남달랐던 것 같은데 잊고 말았다. 내 짧은 기억력도 한 몫 했으나 그것은 순전히 30일 밤부터 내 생일, 신년의 아침까지 온통 정신을 빼 놓은 쿠로오 덕분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 난리법석을 떨고 나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정월의 느지막한 아침에 내가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의 쓰림이 가시기도 전에 억지로 눈을 뜨면 뜨듯이 데워진 이불에 덮여진, 아니 싸여진 내 위에 긴 다리를 걸어 가두듯 한 쿠로오가 “소원대로. 그만 괴롭혀 줬다고.” 라는 둥의 말과 함께 웃어대는 얄미운 말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사무실 책상의 파티션에 기대어 세워 둔 캘린더를 세워 들었다. 11월부터 12월은 조금 복잡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몇 안 되는 기념일이 모두 그 두 장 안에 담겨있었다. 나는 가만히 날짜를 세었다. 벌써 네 생일이 열흘이나 지나가 있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참, 끈질기다 너도. 그리고 거기에 질리지도 않고 “안 돼요, 쿠로오씨.” 하는 정도로 대꾸하는 나도 징했다. 

 한 장을 넘기면 벌써 연간 캘린더의 마지막 장이였다. 캘린더를 샀을 때 네가 가장 먼저 표시해 두었던 나의 생일이 가장 마지막 칸에 까맣고 가장 굵은 매직으로 크게 표시 돼 있었다. 너와 나의 생일의 딱 중간 지점을 기준으로 앞뒤로 하루씩, 총 삼일이 우리의 기념일이었다. 어쩜 둘이 독같이 사귀기로 한 날을 까먹었는지. 둘 다 술이 덜 깼던 건지, 뭔지. 

 법적으로 내가 11월 17일 부터는 형이 맞잖아! 하고 외쳤던 언젠가의 네 모습이 떠올랐다. 참다못해 그럼 연하 사귀던가. 하며 돌아섰던 내게 네가 절절 매며 달라붙었던 기억이 몽글몽글 솟았다. 

 “…벌써 5년이네.”
 ‘아직 5년이지.’

 그리고 네 음성도 들려온다. 나의 생각을 정정해 주는 다정한 네 목소리였다. 나는 그것에 금방 수긍한다. 그래, 아직 오년이지. 고작 손 하나 채웠을 뿐인데. 나는 그 캘린더를 내려놓았다. 때맞추어서 네게서 또 한 번의 문자가 당도한다.

 [애인아… 화났어?]
 [연하랑은 안 사귀어… 사와무라랑 사귈거야…]
 [그냥, 애인한테 형 소리가 들어보고 싶었어…]

 나는 사무실의 파티션 밑으로 후다닥 엎드렸다. 웃음이 터진 탓이었다. 한 번 진하게 화와 함께 욕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는 너는 내게 무언가를 조를 때 내가 장시간 말이 없곤 하면 꼭 꼬리를 내렸다. 이름이 쿠로오여서, 네가 커다란 덩치가 가끔은 귀여운 새끼 고양이로 보이는 걸까. 네가 보낸 문자가 떠 있단 이유 하나만으로 휴대전화의 화면이 참으로 사랑스러워 진다. 나는 한 단어로 지칭하는 그 단어가 참 좋았다. 무뚝뚝하고, 쑥스러워 너만큼은 잘 말하진 못했으나 참 좋아했다. 

 “그래, 애인아. 기념일에는 너무 이르고, 생일 때 즈음… 생각해 볼까.”

 괜히 네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자로는 부족했다. 자리를 뜨지도 않았는데 전화부터 걸었다. 나는 바퀴가 달린 사무의자를 무릎을 펴며 일어나는 것 만으로 밀어내었다. 벌떡 일어났기 때문에 조금 시선이 모여든 것도 같았다. 

 ‘사와무라?’

 내가 사무실의 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화면이 전환된다. 통화시간의 초시계가 착실히 쌓여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날Nal  (0) 2016.12.09
[소설] 노릉쟈  (0) 2016.12.09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온도의 방정식
w.몽쉘
@himoncherQ





 1. 당신의 온도는 몇도입니까?


 “따듯하네요, 오늘도”
 “그래요? 좀 쌀쌀해지지 않았나?”

 그가 주문한 몽블랑을 내놓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제법 강한 바람이 가로수의 낙엽을 흩뿌린다. 쿠로오는 고개를 살짝 젓곤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가게 말이에요.”
 “아, 제가 추위엔 좀 약해서.”

 저도 따듯한 게 좋더라고요.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달콤하다. 다이치는 괜히 무안해져 고개를 숙인다. 목소리로 사람 열은 꼬셨을 거야, 저 남자는.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 일주일 전쯤이었나, 고등학교 때 후배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그와 같이 온 남자는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그 뒤로 뻔질나게 가게에 찾아왔다. 메뉴는 언제나 몽블랑이었기에, 이제는 쿠로오를 보기만 해도 몽블랑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한 번은,

 “맨날 그것만 드시네요?”

 하고 물어봤더니, 쿠로오는 드물게 난감한 얼굴을 하며 머뭇거리다가.

 “익숙한 게 기억에도 잘 남고, 버티기 좋으니까요.”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었다. 거기에 다이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애당초 그렇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고, 늘 같은 메뉴만 먹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올 때마다 노골적인 미소나, 행동, 스킨십 같은 건 다이치로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사와무라씨는 늘 단내를 풍기고 계시네요.”

 사와무라의 목에 저의 얼굴을 묻고는 쿠로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행동이나 말이 뜻하는 바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사와무라는 둔치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었다.

 “단 걸 만드는 직업이라.”

 어설프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곤 하지만, 결코 쿠로오에게 다시 여기 오지 말라던 가, 그런 행동을 그만둬 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제법 예의 차리는 그가 저의 말을 무시할리가 없을 텐데도.

 저를 밀어내는 손에도, 쿠로오는 손이 따듯하네,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한다. 확실히 츠키시마가 예견한대로 그는 가드가 거셌다. 누구에게도 함락을 허락하지 않는 철옹성과 같이. 내기는 글러먹었나 싶다가도, 다이치의 얼굴만 보면 또 아무렴 어때 하고 웃고 만다. 일주일 전,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츠키시마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다. 그날 갑자기 디저트가 먹고 싶어진 자신도.


 “그래서, 갑자기 웬 디저트에요?”
 “먹고 싶어지더라고, 이게.”

 츠키시마는 접시를 두드리는 작은 소음을 그저 바라만 본다. 먹고 싶다며 억지로 끌고 온 당사자는 정작 케이크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됐고, 다음 시리즈는…….”

 도자기와 얇은 쇠가 부딪히는 소리는 퍽 경쾌하다. 츠키시마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쿠로오는 저의 연주에 빠져든다. 얇은 포크는 퍽 귀엽게 끝이 곰돌이 모양으로 장식되어있다. 곰돌이의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눌러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금세 미지근해진다.

 “제 말 듣고 있습니까, 쿠로오씨?”
 “아니, 사실 전혀 안 들었는데”

 쿠로오 테츠로는 단 것 따윈 질색인, 입맛 멀쩡한 성인 남자였다. 눈앞의 답지 않은 귀여운 케이크를 좋아하는 어린애 입맛과는 다르게 말이다. 단 걸 좋아하는 츠키시마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다.

 “저도 당신이랑 이런 곳에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거든요? 집중해주시죠.”
 “캑, 너무 차가운 거 아냐?”

 조금 가게의 따듯한 온도에 케이크가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포크로 몇 번 건드리니 덧없이 크림이 엉겨들어온다.

 “그러고 보니까, 몽블랑 말이야”

 음식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던데, 쿠로오는 입 꼬리를 올려 나쁜 고양이처럼 웃는다.

 “꼭 국수를 얹어 놓은 것 같단 말이지. 디저트치고는 구수하게도.”
 “푸흣,”

 츠키시마는 싸늘한 얼굴로 쿠로오를 노려본다. 웃음소리는 그의 뒤에서 들려온다. 시선을 돌리니, 단정하게 생긴 남자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다.

 “사와무라 선배.”
 “왔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옅은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상냥하게 말한다. 츠키시마의 하얀 얼굴이 드물게 붉게 물든다. 쿠로오는 한쪽 턱을 괴고 그 양상을 멀거니 본다. 아니 사실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 시선이 못 박혀서 움직이질 않는다. 시선을 느낀 남자가 그를 바라본다.

 “아,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저도 학생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슬쩍 목을 긁는 팔이 단단하다. 얼굴에 정신팔려있었는데, 이제 보니 몸이 제법 좋다.

 “운명이네요, 이거.”
 “하하, 이건 서비스에요.”

 그러면서 남자는 퍽 앙증맞은 딸기 케이크를 들이민다. 그의 말에도 웃는 폼이 이런 멘트에 단련된 것 같다. 퍽 투박한 손은, 잡으면 또 별미일 것 같은 모양새다. 단 걸 먹지도 않았는데, 쿠로오는 그에게서 흘러나온 단내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는 츠키시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주오라고 말하곤 깔끔하게 퇴장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폼이 자연스럽다.

 “누구?”
 “고등학교 때 알고지낸 선배입니다. 지금은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달콤함이랑 지독히도 안어울리기도, 어쩌면 깜찍하게도 어울리는 남자가 아닌가. 쿠로오는 눈을 빛내며 츠키시마를 불렀다. 있지-

 “싫습니다, 절대.”
 “나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소개 시켜 달라 할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역시 똑똑하네, 우리 안경군은? 헤벌쭉 웃는 얼굴이 퍽 얄밉다고 생각한다. 츠키시마는 그가 주고 간 케이크를 깨작거리던 손을 멈춘다.

 “쿠로오씨는 절대 못 꼬실 걸요.”

 네까짓 게, 하는 얼굴이지 저거? 안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올리는 게 딱 그 뜻이지? 괜스레 불붙는 승부욕을 숨기고 쿠로오는 짐짓 여유로운 척 웃었다.

 “내기할까 그럼? 내가 저 사람의 온도를 알아낼 수 있는 지 없는지?”
 “뭘 거시게요?”
 “내 부랄.”
 “절대로, 필요 없어요.”

 쿠로오는 즐거운 눈으로 열린 주방 창으로 흰 앞치마를 두른 남자를 훑는다. 저 단단한 사내를 안으면 과연, 따듯할까?


 2. 나의 온도는 지금,


 “39.4도네요.”
 “진짜 아픈 거 맞대도?”

 쳇, 츠키시마는 짧게 혀를 찬다. 당신 때문에 내기에서 졌잖아요, 책임지세요. 투덜거리는 폼이 또, 편집장이랑 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저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는 츠키시마를 혼내야할까, 애초에 아픈 사람을 두고 내기를 걸어온 편집장을 욕해야 할까. 답 없는 고민을 한숨으로 뱉어낸다.

 “그보다도, 심각한 일이 있다고.”
 “뭔데요?”
 “사와무라를 벌써 이틀이나 못 봤어.”

 망할 감기 때문에 말이지. 마른기침을 쿨럭이며, 쿠로오는 처량 맞게 웃었다.

 “아직 거길 가고 있었어요?”
 “응, 슬슬 나에게 반해가던 참이었다니까.”

 츠키시마와 내기한 이후부터, 쿠로오는 꾸준히 시도 때도 없이 사와무라의 가게에 얼굴을 비췄다. 요 이주일간 먹은 디저트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려왔다. 그래도 그 사이 많이 친해져, 그가 늘 사가는 메뉴도 기억 할 정도가 되었다. 혼자 스스로의 성취에 뿌듯해하고 있자니, 츠키시마의 짜게 식은 눈과 마주친다.

 “뭐 어쨌거나, 마감은 미뤄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해.”

 쿠로오는 퍽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었다. 간신히 얼마 전 쓰게 된 추리물이 인기반열에 오른 정도? 이때의 휴식이 안겨줄 손실은 큰데. 눈물을 삼키고 있자니, 츠키시마는 아까 챙긴 돈을 흔들며,

 “뭐, 예의상 필요한 거 있으면 사다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내 돈으로 말이지.

 “그럼, 사와무라군?”

 한껏 달콤하게 목소리를 내니, 츠키시마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온다.

 “선배는 물건이 아닙니다.”
 “군이 만든 디저트였습니다. 네, 잘못했어요.”

 내 이름 대면 알아서 챙겨줄 거야. 뿌듯하게 말하는 쿠로오의 목소릴 건성으로 들으며 츠키시마는 신발을 챙겨 신는다.

 “예, 예, 환자는 쉬기나 하세요.”

 아아, 사와무라군 보고 싶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으며, 쿠로오는 감기인지 상사병인지 앓는 소릴 내었다.

 잠깐 잠들었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쿠로오는 벌써 어두워진 방 천장을 바라봤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옅게 방을 비춘다. 확실히 좀 자고 나니 몸이 가볍다. 몸을 억지로 일으키니 여기저기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품을 삼키고, 간질거리는 목을 긁는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휘적휘적 냉장고로 향한다. 차가 제멋대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 방음 안 되는 집이라니까. 냉장고는 조금 둔한 소릴 내며 열린다. 거의 텅텅 비어있는 냉장고 한 가운데 핑크빛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의 리본으로 포장된 유리병도.

 “츠키시마가 사다뒀나?”

 유리병을 열어보니 유자청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마침 잘됐다 싶어 물을 끓인다. 생강이 감기엔 딱 인데, 그나저나 츠키시마에게 이런 상냥함이? 컵에 적당량을 덜어 뜨거운 물을 붓는다. 단내가 훅 끼쳐온다. 눈을 꼭 감고 입에 넣는다. 생각보다 달지 않다. 오히려 꽤 맛있어.
 상자에는 그가 기억에 남으라고 일부러 매일 사가던 몽블랑이 예쁘게 담겨있다. 츠키시마에게 인사나 할 겸 전화를 건다. 신호음은 적막한 집에 크게 울리다가 멎는다.

 -여보세요.
 “아, 츠키시마. 케이크 고마워.”
 -저도 잘 먹었어요. 나중에 지갑 보고 울어도 안 돌려드릴 거예요.
 “좀 봐주라, 난 가난하다고. 것보다 꽤 상냥한데? 유자청도 챙겨주고. 게다가 달지도 않아서 맘에 들었다고 이거.”
 -그거 제가 산 거 아니에요.

 사와무라 선배한테 쿠로오씨 아프다는 얘길 전했더니, 챙겨주더라고요. 이거라면 입에 맞을 거라면서.

 겨울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온 밤은 퍽 서늘한 바람을 뿌렸다. 슬리퍼 신고 뛰쳐나온 발이 베어질 듯 얼얼하다. 가쁜 숨이 뜨겁다. 이래서야 나아가던 감기가 더 악화될 터였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당장,

 “어서 오세요.”

 가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면서도 상냥하게 그가 말했다. 이내 쿠로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젠장, 생각해보니 오늘 씻지도 못했는데. 급 부끄러워져 얼굴을 가린다.

 “그, 알고 있었어요?”
 “뭘요?”
 “내가 단 거 못 먹는다는 거.”
 “엄청 티내시던데요.”

 조금 짓궂은 얼굴도 사랑스러운 건 미쳤다는 징조일까. 쿠로오는 지금 당장 저 달콤함을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 이틀 안 왔는데, 걱정은 들었어요?”
 “뭐 좀 섭섭하긴 하더라고요.”
 “고작?”
 “좀 걱정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몽블랑은 그렇게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익숙해졌다고 넘겼는데, 그의 배려였나. 이 지독하게 상냥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숨을 쥐락펴락했다. 오버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끌어안아도 돼요?”
 “절대 싫어요.”

 역시 그렇지, 일단 나 씻지도 못했고. 조금 침울해하는 그의 머리 위로 손이 얹어진다.

 “대신 다 나으면 우리 놀러나 갈까요?”

 닿은 손은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쿠로오는 열이 올라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랫배 아래도 조금.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노릉쟈  (0) 2016.12.09
[소설] 런비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소설] 쵸코  (0) 2016.12.09


저희, 연애합니다
w.미남
@RYUtiful_JH




 -♡2학년 5반, 메이드 카페♡
 놀러오세요!
 ★사와무라 다이치 선생님도 함께 합니다★


 “이것들이 진짜… 안한다니까...!!!”
 “뭘 안 해?”
 “아악, 깜짝이야!!”

 뒤에서 어깨를 잡으며 말을 거는 쿠로오의 급습에 놀란 다이치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복도가 전부 울릴 지경이었다. 지금이 점심시간이어서 다행이지, 아마 수업시간이었다면 적어도 교실에서 어느 선생님이든 나와 두리번거렸을 게 뻔했다. 다이치는 방금 뜯어버린 전단지를 꽉 쥐고는 후우, 심호흡을 크게 했다.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근데 그건 뭐예요?”

 쿠로오의 말에 다이치는 제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꾸깃,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전단지가 구겨진다. 이어 다이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전단지를 제 뒤편에 숨겼다. 그 모습에 쿠로오는 제 턱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아, 하며 손가락을 부딪혔다.

 “축제 준비 때문에 그래요?”
 “네… 뭐, 비슷하긴 한데요.”
 “사와무라 선생님 반이… 메이드 카페던가?”

 쿠로오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다이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그의 올라간 입꼬리의 의미를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이미 소문난 거, 잘 해봐요.”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홍보하는데 어떻게 몰라요? 쿠로오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어느새 호탕한 웃음으로 번졌다. 다이치의 얼굴은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울상이 된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면서, 쿠로오는 다이치가 여전히 귀엽다고 느꼈다. 망했어, 라고 중얼거리는 저 입술조차 너무나 귀엽다. 쿠로오는 다이치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후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입을 떼었다. 시선은 축축하게 젖어 보이는 다이치의 눈동자에 고정하면서.

 “깜찍하게 토끼 머리띠 같은 거 쓰면 좀 낫지 않을까?”
 “징그러워.”
 “그렇게 단칼에? 너무한데요. 나 상처 받았어.”
 “아 그러세요. …근데 선생님네 반은 뭐해요?”
 “아, 우리 반? 호러카페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와무라 선생님도 놀러와요. 특별히 선생님은 특별코스로 대접해 줄 테니까.”

 다이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호러카페라면 딱 질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라면 몸서리를 치는데다가, 나름 한 덩치하는 체육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무서움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굳이 쿠로오나 반 아이들 앞에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그곳에 안 가면 되니까. 정말 단지, 그렇게만 생각했건만.
 대체 왜 축제 당일 다이치 자신이 메이드 복을 입고, 호러카페 앞에 와 있는 건지. 이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이치는 머리를 싸매고 입술을 깨물었다. 3학년 1반의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여자아이들의 비명소리와 귀신들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다이치는 발끝을 오그라뜨리고 쿵쾅거리며 흔들리는 창문을 주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그래, 돌이켜보면 사건의 발단은 오늘 아침이었다. 축제의 개막을 알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와무라 다이치 선생님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겠다고 우루루 몰려온 남자애들과 체육 선생님의 색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여자애들, 학교에서 누가 봐도 번듯한 교사 이미지인 다이치의 메이드 복을 입은 모습이 궁금했던 몇몇 선생님들이 대거 찾아오는 통에 2학년 5반의 메이드 카페가 대박을 친 것이었다. 의외로 반응이 폭발적이자 아이들은 홍보도 할 겸, 다이치를 반 밖으로 밀어냈고 다이치는 그 때문에 여러 반을 돌다가 결국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1반 교실의 뒷문으로 여자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자 흔들리던 창문과 귀신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다이치는 뒷문으로 녹초가 된 귀신들이 딸려 나오는 것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 와, 무, 라, 선, 생, 님…….”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아, 아. 놀랐잖아요. 쿠로오 선생님….”
 “내가 더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합니까.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어우, 복장도 장난 아니네.”
 “그냥 홍보차 온 거거든요.”
 “홍보? 아, 카페?”
 “네.”
 “안한다더니 열심히 하시네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애들이 그렇게 실망하는 눈빛을 보내는데 어떻게…”
 “근데 메이드 복, 꽤 잘 어울려요. 예쁘네요.”

 뭐? 다이치는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이게 예뻐요? 다이치가 재차 물었으나 쿠로오는 능글맞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억지로 꽉 조여 더욱 두드러진 허리라인을 장식하는 큰 리본이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올라간 스커트며 그 아래로 살짝 살짝 보이는 숨 막히는 허벅지며, 떡 벌어진 어깨와 크고 넓은 가슴근육 탓인지 터질 것만 같은 블라우스 따위는 사람만한 곰 인형에 바비인형의 옷을 억지로 끼워 넣은 듯 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귀엽다고.
 일그러진 다이치의 표정과 다르게 쿠로오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평소에도 저를 놀리는 것이 즐거움인 그에 대해 딱히 어떠한 제재도 하지 않았건만, 다이치는 괜히 심술이 나 입술을 삐죽이며 이번에는 제대로 자신을 놀리는 것을 방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이치가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 마다 큰 발을 우겨 넣은 검정 힐에서는 또각또각 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울렸다. 다이치가 바싹 쿠로오의 턱 앞에 도착했을 때,

 “사와무라 선생님!”
 “어?”

 한 순간이었다. 네명의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1반 안으로 다이치를 밀어 넣은 것은. 그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다이치의 뒤에서는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캄캄한 어둠 뿐인 공간에서 다이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곧 생각했다.
 이곳은 귀신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1반의 호러카페고, 아이들이 쿠로오 선생님과 진지하게 이야기 하려는 자신을 갑자기 밀어 넣었고, 빠져 나오지 못하게 앞문을 잠궈버렸다는 것 따위를. 그리고 본인이 이제 ‘죽었다’는 사실을.
 상황파악이 된 후에 다이치는 필사적으로 잠긴 앞문을 두드렸다. 살려줘, 야. 나 이거 진짜 못 해! 같은 말을 수십 번은 던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사히 탈출하라는 아이들의 웃음 섞인 말 뿐이었다. 
 결국 다이치는 교탁 앞에 놓여진 붉은 손전등을 들고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또각, 또각. 온통 암흑뿐인 두려움을 헤쳐 나가기에는 다이치의 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으스스함을 더하면 또 모를까. 다이치는 결국 몇 발자국 가지 못해 구두를 벗고 제 손에 구두를 쥐었다. 뭐든, 뭐든, 나오기만 해봐라. 이걸로 때려버릴 테다, 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하면서.
 아니, 아니. 돌이켜 보면 그건 너무 무모한 용기였다. 다이치는 벌써 두 번째 코너부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 나오는 귀신들은 무슨 특별 훈련을 받은 것 마냥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한 귀신이 다이치의 발을 잡고 가는 길을 방해하면 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귀신이 머리를 떨어트리는 식이었고 한 코너를 돌아 귀신을 마주하게 되면 귀신과 왔던 길을 다시 추격하기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귀신들을 만나면서 질렀던 소리가 너무 커 다이치는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페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나오는 거냐고. 

 “사와무라 선생님!”

 더 이상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 한다고 생각할 때 즈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쿠로오였다. 또렷한 얼굴이 아닌 실루엣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쿠로오였다. 암흑을 뒤지며 저를 찾는 쿠로오를 보자마자 다이치는 구두까지 내팽겨치고 그를 안았다. 엄청난 힘으로 안겨진 쿠로오는 잔기침을 뱉고 다이치를 불렀지만 다이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더욱 세게 안았다.

 “왜 이제 왔어요….”

 잔뜩 울음과 투정이 섞인 듯 한 목소리에 쿠로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저, 아니, 그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이치가 쿠로오를 안아버린 덕분에 꽤나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고 그것을 정면에서 목격한 귀신은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반에 깔린 귀신들의 눈치를 보며 오들오들 떠는 다이치를 달랜 후 자세를 고쳐 안게 해주었다.

 “움직일 수 있죠?”

 저를 안는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쿠로오는 그것이 자신이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여겼다. 쿠로오는 다이치의 힐을 다시 집어 들고 출구로 향했다. 다이치는 출구에 도달할 때 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귀신들은 마지막까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이렇게 까지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라고 해요, 그걸…?”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있는 1반 아이들이었다. 무사히 탈출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급하게 대충 종이에 써낸 글씨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다이치는 그저 힘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너네 죽는다, 진짜….”
 “아 선생님이 너무 안 나와서 쿠로오 선생님이 구하러 들어갔다 온 거예요.” 
 “쌤, 그렇게 많이 무서웠어요?” 
 “진짜 우리 대박이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사진을 찍었고, 쿠로오는 다이치의 등을 여전히 쓸어주었다. 다이치는 너무 소리를 지른 탓에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혼내는 시늉을 했다. 이상하게 쿠로오는 안에서 다이치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기보다는 평소처럼 저를 놀리는 농담 따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이치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혼을 내다가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그 때 마다 쿠로오는 등을 돌린 채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 때, 다이치는 이미 눈치 챈 후였다. 쿠로오의 귀에서 붉은 빛이 돌고 있었음을. 


*


 “어라.”
 “…….”
 “이거, 사내연애?”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쿠로오의 입꼬리가 은밀하게 올라갔다. 다이치는 게시판에 떡 하니 붙여져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을 당황해하며 뜯어냈고 제 손에서 그것을 놓을 줄을 몰랐다. 이게, 대체 뭔데요. 다이치는 폴라로이드 안에 떡 하니 박혀있는 쿠로오와 자신의 자신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메이드 복장 차림으로 쿠로오에게 안겨있는 자신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 아래에는 아기자기한 글씨로 년도와 날짜 등이 써져있었다. 분명 1반 아이들의 짓이 틀림없으리라. 다이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보기 좋기만 한데. 쿠로오는 제 시선을 힐긋 돌려 다이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다이치의 시뻘개진 두 귀를 볼 수는 있었다. 오야오야, 다이치 선생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래 내 싸인도 좀 해줄까? 능글맞은 소리에도 다이치의 귀는 식을 줄 몰랐고, 뒤에서는 그 광경을 목격한 남고생 몇 명이 눈치 없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사와무라 선생님?”
 “안, 안 아프거든요.”
 “그럼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여긴 너무 시끄럽잖아. 사진에 대해서 할 말도 많을 거 같은데요.”
 “…하, 학교에선.”

 응? 쿠로오는 이어지는 말에 떼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행동처럼 소심한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쿠로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이치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둘을 구경하는 학생들이 조금 더 늘어있었다.

 “학교에선,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밖에선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그리고, 어제, 어제.”
 “…어제?”
 “어제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귀여워. 그렇게 생각하며 쿠로오는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 했다. 쿠로오는 제 가슴팍을 두어 번 치고는 큼큼 거리며 콧잔등을 쓸었다. 이걸 무슨 말로 받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반응이 좋아 귀엽다는 것이,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는 것. 어제 다이치가 자신을 안았을 때, 비로소 확신했다. 연애하는 게 발각되면 최소 퇴출이겠구나, 생각하며 쿠로오는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뒤에서는 익숙한 발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끝나고 어디 가요?”
 “딱히….”
 “그럼 같이 저녁 먹을래요?”

 발소리가 멈춘다. 쿠로오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네, 희미한 대답이 시끄러운 복도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진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다시 발소리가 움직였다. 쿠로오가 양 손을 뒤로 했다. 다이치는 양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그의 손에 폴라로이드 사진을 쥐어주었다. 가볍게 사진을 쥐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서로 안고 있는 둘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런비  (0) 2016.12.09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소설] 쵸코  (0) 2016.12.09
[소설] 코로  (0) 2016.12.09



그들의 생일 가운데
w.시즈쿠
@syzku





 “어라? 사와무라군, 내 생일 알고있었어?”
 “당연하지, 내 애인의 생일도 기억 못할까봐?”

 11월 17일. 쿠로오. 쿠로오 테츠로의 생일이다. 18번째 생일이지만 그의 연인인 사와무라 다이치와 곁에 있으며 처음 맞아보는 생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별 감흥도 나지 않는 제 생일이 언제 오려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제 연인에게 생일선물이란것을 받았다. 다이치는 제 생각보다 훨신 좋아하는 쿠로오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배구부의 성숙한 주장이라지만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선물을 받은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쿠로오는 다이치가 웃는 모습에 살짝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처음사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준 선물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기뻤고, 정말로 소중했다. 활짝 웃는 쿠로오를 보며 다이치는 이번생일을 챙겨준것이 잘 한 일이라며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앞으로의 생일도 챙겨주자 마음을 먹었다.

 “사와무라, 너는 생일 언제야?”
 “나? 나는 한 해가 끝나는 날.”

 쿠로오는 다이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 거리며 머리로 다시 되새겼다. 12월 31일. 한 해가 끝나는 날. 쿠로오는 계속 생각에 잠기다가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를 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명목도 없이 터뜨릴수는 없었기에 쿠로오는 다이치의 생일을 저장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자신의 생일과 다이치의 생일을 비교하며 계속 손가락을 올렸다 내였다 하는 순간에 그에게 좋은것이 떠올랐다. 이유도 왠지 그럴싸했고, 꽤나 특별한 이벤트.


*



 12월 9일. 쿠로오는 다이치를 보러 미야기로 내려갔다. 당연히 다이치는 연습중이였고, 쿠로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쿠로오는 기차에서 내려 천천히, 느린걸음으로 카라스노를 향해 걸었다. 배구부가 끝나는 시각, 다이치는 제 애인에게서 문자가 도착했고, 문자를 읽고나서 당황했다.

 [사와무라, 나 카라스노 앞이야]

 다이치는 그 문자를 보고나서는 바로 학교 정문으로 뒤어갔다. 가보니 기다리고 있던것은 쿠로오. 다이치는 얘가 왜 왔나 싶어 물어보려는 찰나에 쿠로오가 먼저 행동했다.

 “사와무라, 짜잔~!”

 그는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맞춰주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이 우리들 생일 가운데 날 이라잖아~? 그래서 준비했지. 어때, 맘에 들어?”

 다이치는 그말에 어이가 없어 헛헛 웃으면서도 내심 기쁜것을 숨길순 없었다. 쿠로오의 친구들 말로는 이벤트라던가에는 모르는것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준비한것을 보며 대견하기도 했고, 제 연인이 귀엽기도 했다. 이것들을 준비하려 고생한 추억과 그 때문에 더 고생한 쿠로오의 친구들이 문에 훤히 보였다.

 “쿠로오, 나 따라와봐. 내가 좋은곳 알려줄께.”

 다이치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쿠로오를 이끌고 자신만의, 자신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 뒷산으로 나 있는 길 중간을 빠져나가면 보이는 꽤나 오래된 폐가. 아무리 폐가라지만 집 자체가 깨끗했다. 다이치는 익숙하다는듯이 마루청에 앉아 쿠로오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고생했겠네... 그래서 뭐 안 힘들었어?”
 “많이 힘들었지~. 얏쿵은 계속 타박하고, 카이는 랄까 너무 고전적이라서 힘들었지.”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답을 하던 쿠로오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감탄을 쏟아냈다. 겨울이라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그 위로는 도쿄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별빛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반딧불이들. 쿠로오는 처음 본 광경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전에 와봤다고 쳐도 그 때에는 연습에만 집중해서 못 봤던 상태였기에 쿠로오, 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때, 명당이지? 여기 집도 내가 다 치워놨지. 봐봐, 깨끗하잖아?”
 “응, 그러게. 왠지 깨끗하더라...”

 쿠로오는 하늘에 박힌 별들을 구경하다가 다이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사와무라군, 나 또 여기 와도 돼? 네 생일때 말야.”
 “당연하지~. 말만 하고와.”

 쿠로오는 알겠다며 손으로 브이자를 짓고서는 웃어보였다. 그러고는 다이치에게만 들릴정도로 고요히 말했다.

 “우리의 가운데 생일. 매년 기대할게.”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쵸코  (0) 2016.12.09
[소설] 코로  (0) 2016.12.09
[소설] Naru  (0) 2016.12.09



임시경호는 언제 끝나는가.
w.쵸코
@cyoko_HQ





 “아 무슨 임시경호원이야~ 나 그냥 계속 팀장하게 해줘!!”
 “어쩔 수 없잖아. 전 담당 경호원이 크게 다쳤다지 않나. 어차피 두세 달 밖에 안 되니, 머리 식힌다는 생각으로 해“
 “아니 첫째 아가씨랑 막내 아가씨도 있는데 왜 하필 둘째야??왜?!”

 SD기업의 제 1경호팀 팀장 우시지마 와카토시. 제 2경호팀 팀장, 쿠로오 테츠로.
 그러나 갑작스레 SD기업 집안의 둘째 도련님의 임시경호를 맡게 되며 투덜대고 있었다.
 사와무라 집안의 첫째. 시미즈 키요코. 셋째 시미즈 야치. 그리고 사와무라 집안의 유일한 남자, 사와무라 다이치.
 같은 남매인데 어찌 성이 다르냐 하면은, 워낙 남녀의 구별이 심한 사와무라 집안이기에 여자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쿠로오가 하루 종일 투덜대는 이유다. 여자가 2명이나 있는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 둘째 다이치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이다.

 “되라는 복권당첨은 되지도 않으면서 30퍼의 확률로 걸릴게 뭐람? 어? 이봐, 우시지마. 너 전속경호원 할 생각 없으신가?”
 “없네.”
 “매정한 새끼”
 “그만 징징대고 이거나 읽어“

 우시지마가 던져주는 종이더미를 보고 더욱 진저리를 치는 쿠로였다.


 “안녕하십니까. 3개월 동안 임시경호를 맡게 된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사와무라 다이치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싫다며 발작을 하던 쿠로는 어디가고, 다이치에게 먼저 악수를 건네며 점잖이 인사하는 듬직한 경호원만이 서있었다. 그리고 서로 접대웃음을 보이며 맞잡은 손은 차가웠다.


*



 언제 끝나지. 아, 서있기도 지겹다. 도련님은 앉아있어서 참 좋겠다. 3시간동안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저번 주 브리핑에서 들으셨다시피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AR입니다. 이번 피엠(PM)이 저인만큼 여러분과 잘 되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봅시다.”

 AR? PM? 노래? 오후?

 “현재 회사 주가.....IPO.....따라서....PER......경제..궁시렁궁시렁..용어.....어렵라블라..”
 (사실 현실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경제용어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전문용어를 썼습니다.)

 시X 뭐래. 들으려고 한 내가 멍청이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아 드디어 끝난 건가. 후 제발 한발 짝이라도 움직이게 해주라. 오랫동안 가만히 서있는건 내 적성에 안맞다고.

 “...씨...오씨..? 쿠로오씨!!”
 “ㅇ,아 예..!”
 “뭐하십니까. 나가야죠.”
 “예. 차까지 모시겠습니다.”

 장장 5시간동안 꿈쩍 않고 생각만으로 우주 끝까지 다녀온 쿠로오가 다이치의 호명에 정신 차리고 회의실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무거운 안개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싣고 묵묵히 달려 나가는 벤츠.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쿠로오씨. 오늘 저녁 어떠십니까.”

 ...?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건가? 저녁? 설마 나랑 같이 먹자는 건 절대 아닐 테고. 저녁 추천해달라는 말인가?

 “평범하게 드시던 대로 어떠십니까.”
 “...그러죠.”

 왜물어본거야.


 다이치가의 저택에 도착하여 한 시간 가량, 근무시간 중 유일한 자유 시간이자 쉬는 시간인 저녁시간이 되자 잠시 경호팀 사무실에 발을 옮긴 쿠로오.

 “여어- 잘 지내고 있냐? 쉐키들아?”

 안녕하십니까―! 떼창같은 우렁찬 인사소리에 입 꼬리에 호선을 그린다.

 “나 없으니까 살만하냐?”

 능글맞은 얼굴에 장난 끼를 담은 눈을 하고 단정히 포마드 머리를 한 회색머리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네!! 살만 함다!”
 “이 새X가, 살만해? 엉? 좋냐?”

 헤드락을 걸어 회색머리 남자가 가진 난초 같은 눈동자를 감게 만들었다.

 “아악! 잘못했어여! 놔주세여!! 어? 쿠로상 전화 오는데여?”

 울리는 핸드폰을 보자 괜스레 몸에 긴장이 들어가게 만드는 단어다.
 사와무라 다이치.
 유일한 쉬는 시간에도 쉬지를 못하게 하냐. 고달픈 내 인생.

 “네. 쿠로오 테츠로입니다.”
 “쿠로오씨 지금 어디십니까?”
 “경호 2팀 사무실입니다.”
 “식당으로 내려오시죠.”

 쉬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둥, 궁시렁거리며 허겁지겁 식당으로 달려가 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느긋하게 걸어왔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길고 흰 고풍스런 식탁위에 진수성찬으로 차려져있는 일식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자신의 경호주인.

 “부르셨습니까.”
 “앉으시죠.”

 두 사람 분의 젓가락이 놓여있는 식탁. 그러나 음식들은 전혀 두 사람 분의 양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앉아서 같이 저녁 먹자구요.”

 빙그레 웃는 다이치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 이내 다이치의 건너편 자리에 착석했다.

 “3개월이라 해도 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할 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나마 친밀감을 가져보고자 조촐하게 준비했습니다. 부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조촐...?어디가 조촐이야.
 은젓가락이 돌 젓가락으로 변한 듯 무겁게도 느껴졌다. 입 열리는 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넘기기를 두어 번.

 “쿠로오씨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으신 편인가요?”
 “사적인 곳에서는 말이 없는 편도, 말이 많은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때에는 제 직업도 직업이다 보니 자연스레 말주변이 없게 됐습니다.”
 “전 지금 쿠로오씨를 비즈니스로 부른 게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편해지겠냐.

 “쿠로오씨는 사와무라 다이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가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입을 여는 다이치.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구요.”
 “글쎄요. 아직 사와무라씨를 알게 된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느낀 바로는 책임감 있으시고 듬직하고 친절하신 분입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마워요. 그럼 우리 집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

 쥐고 있던 젓가락 한쪽을 떨어뜨릴 뻔했다. 같은 대답을 두 번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이거 말 잘못했다가는 잘리는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 위험한 질문을 하는 거야. 사람 곤란하게.

 “제가 너무 곤란한 질문을 했나요? 걱정하지마세요. 씨씨티비는 있어도 목소리까지 녹음되지는 않으니까요.”

 이건 뭐 완전히 끽하면 잘린단 소리잖아.

 “.....조금..보수적인 면이 있다고 하면 화내실 건가요.”
 “아뇨. 그럴리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입을 보며 쿠로오는 어쩌면 자신에게 다이치라는 사람은 알기 힘든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전과 다름없이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벽을 두고 멀찍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3~4주.
 웬일로 1시간이나 일찍 퇴근시켜주는게 기뻐 잉여의 시간을 만끽하다 잠든 쿠로오. 그러나 그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쿠로오씨 어딥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나 혀가 술에 담그다 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사와무라씨..?”
 “아 여보세요? 혹시 쿠로오씨 되십니까? 아..다이치 친구 되는 사람인데 다이치가 오늘 많이 취해서...최근에 통화한 기록 보니까 유일하게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길래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여기가- ”


 아-내가 왜 이 달밤에 나와야하냐고. 후..그래 전속경호원인게 잘못이지..
 속으로 한참 다이치를 원망하며 빛의 거리로 들어섰다.

 “정신차려보십시오. 사와무라씨. 도련님? 제 말 잘 들리십니까?”

 다이치를 들쳐 업듯 부축해서 겨우 한적한 거리로 나온 쿠로.

 “아...쿨오...씨..?음..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얼버무리다가 삐끗하는 다이치의 허리를 잡아 단단히 붙잡았다.

 “하..차에 타시죠.”

 다이치의 방까지 무사히 끌고(?)온 쿠로오. 다이치를 쇼파에 내팽개치듯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풀썩 늘어졌다.

 “하아..하..씨이...은근 근육량 많네...후아..”

 서너 번 숨을 고르던 중, 다이치의 입이 열렸다.

 “쿠로오씨...왜 아직도 사퇴 안했어요?”

 ?지금 뭐라고요? 내 이 주둥아리가 방정을 떨었나. 나도 모르게 뭔 말을 지껄였나. 왜저래.

 “예? 사퇴라니요..?”
 “솔직히 우리집안에서 일하기에는 구로오씨 너무 아깝다는 생각 안해요?”

 얼씨구 이제 이름도 막 바꾸네.

 “나 같으면 이딴 곳에서 당장 박차고 나갔을 텐데...왜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 몸을 담그고 있어여...”
 “사와무라씨 집이잖아요. 자신의 집안이 그렇게 싫으세요?”
 “X발...”

 ???!?!?!내가 잘못들은거 아니지??? 방금 욕한거 맞지?? ㄱ,근데 나보고 어쩌라고..왜 나한테 욕해..

 “욕해서 미안합니다. 난 사실 우리 집이 싫어요. 엄격한 남아선호사상에 가부장적인 이런 X같은 곳이 싫다구요. 나도 힘든데, 우리 누나는 얼마나 힘들었겠어.. 미안해요 쿠로씨. 술이 들어가더니 할 말 못할 말 막 내뱉네요. 무시해 주세요. 미안합니다..미안합니ㄷ...”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반복하다 결국 옆으로 쓰러져 잠들었다. 다이치의 방에 남은건 혼잡한 쿠로의 마음이었다.


 다음날 다이치는 기억이 나는건지 안나는건지 숙취따윈 쿠로에게 준 듯(?) 아주 멀쩡하게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죽어나는 것은 쿠로오였다.
 으...졸려죽겠네...어제 그렇게 말해놓고 잠들면 어쩌자는거야. 괜히 내가 불편해지네...
 집무실에 남아있는 단 두 사람. 혼자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쿠로오씨. 거기 서있지 마시고 소파에 앉아요.”
 “아닙니다. 이건 제 일인걸요.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제 일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나요?”

 머뭇거리다 다이치의 말에 이끌려 소파에 앉게 되었다.

 “사와무라씨. 지시하신 일 다 끝냈습니다.”
 “.....”
 “사와무라씨?”
 “.....”

 일에 집중한 것인지 쿠로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책상 위 서류들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날 쳐다보겠지 하며 소파에 잠시 기댔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신이 잠에 취해 가는지도 모르고 편안함에 빠져가고 있었다.


 으컹헉!

 콧소리와 함께 눈을 뜬 쿠로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급하게 화들짝 일어나자 발치에 떨어지는 부드러운 감촉. 담요다.

 “어..?”
 “이제 일어났어요? 어제 나 때문에 많이 피곤하게 만들은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더군요?”
 “아..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냥 깨워주십시오.”
 “일부러 쿠로오씨에게 일 시킨 겁니다. 앉아서 좀 쉬라구요.”

 어제 이후로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한) 쿠로오였다.
 빛은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



 다이치의 임시경호원으로 일한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어갈 남짓, 두 사람은 친구처럼 농담도 일상도 공유할 정도로 친해져갔다. 이제는 둘이 나란히 집에 하하 호호 웃으며 들어올 정도였다. 빛은 문 앞에 다다르렷다.

 “크하핳 그래서 내가―”
 “사와무라 다이치”

 웃음꽃을 피며 들어오던 두 사람의 앞길을 막은 것은 다이치의 아버지라는 자였다.

 “ㅇ,아버지..”
 “할 얘기가 있다. 들어오너라.”

 부자간의 사이에 흐르는 어두운 적막. 그 사이를 깨고 들어오는 더 어두운 말.

 “네 약혼자를 구해뒀다.”
 “예..?”
 “언제까지 일만 할 거냐. 자고로 남자는 집안의 대를 이어가는 일도 중요한 것이다.”
 “아버ㅈ..”
 “이번 주 목요일 저녁 7시. 다테레스토랑이다.”

 제대로 말 한번 꺼내보지 못하고 부자간의 대화가 끝났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다이치가 우두커니 무릎 꿇고 앉아있을 뿐이다.


 “오야? 무슨 얘길 나눴길래 표정이 안 좋아?”
 “.....나 선본다. 아니 이미 배우자가 정해졌대.”
 “에..? 그게 무슨..?”
 “이제는 일방적으로 결혼하라고 하시네. 하, 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설마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 정략결혼이라던가 그런건가. 와 정말로 그런 게 있구나.

 “ㄱ,그래도 직접 만나보면 좋은 사람 일수도 있지..!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니까.”
 “그래 고마워.”

 차갑게 말을 잘라버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다이치.
 ..?뭐야 난 기껏 위로해줬는데.
 똑똑 두드릴 수도 없는 빛은 문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



 “이야~쿠로 이 자식 웬일이냐! 이 시간에 시간도 내고~”
 “오늘 우리 도련님께서 일찍 퇴근시켜주셨지 뭐야~으하핳!! 야! 오늘 달리자!”
 “뭘 달려 미x놈아, 내일까지는 출근해야 돼.”
 “아안돼―!! 난 오늘 달리고 싶다고!!”

 결국 저녁과 카페로 합의 본 두 사람.

 “이씨..니랑 둘이서 마주보고 카페에서 뭐하냐. 보쿠토 니놈 낯짝 보기 싫다.”
 “닥쳐. 난 뭐 좋은 줄 알아? 내가 시간 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라.”
 “뭐래 병X이. 나한테 감사해야지. 그나저나 너 요즘 어떠냐.”
 “뭐가? 일? 그냥 뭐~ 여전히 힘들게―”

 보쿠토가 한창 말하던 도중 보쿠토의 뒤편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하고 있어ㅅ... 야, 내말 듣고 있냐?”

 오야? 뜻밖의 소개팅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이 새ㄱ...야 안들리냐?”
 “쉿. 조용히해봐. 나 지금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다고.”
 “뭔 지X이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목요일이었지. 분위기를 보니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호오..
 그 때 자신의 시야를 막는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우왁!! 아 뭐야! 왜 휴지를 던져!”
 “아 미안~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배워서~크하하 사람 앞에 앉혀놓고 어디보냐? 왜, 내 뒤에 예쁜 여자라도 있어?”
 “아 없어없어. 있어도 너한테 관심 1도 없음.”
 “오~ 야 저기봐봐. 저 여자 좀 이쁘지 않냐. 근데 아쉽다. 소개팅 중인듯.”

 보쿠토가 가리킨 곳은 쿠로가 계속 쳐다보던 테이블이었다.

 “아 이새퀴 설마..! 나 몰래 저 여자 쳐다보고 있었던 거냐!! 비겁한 놈!”
 “닥쳐. 내가 너인줄 알아? 그 앞사람 쳐다보고 있었다.”
 “앞사람..?저 체격 좋은 남자..? 너 취향이 그런 쪽이었냐..?”
 “뭐? 맞을래?”

 자꾸 다이치의 테이블에 시선이 갔다. 괜히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나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싶어서 귀를 더 쫑긋거렸다. 여자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어..? 왜지..? 항상 같이 붙어있던 사람을 떠나보내서 그런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비의 마음이 이런 건가. 오늘 멋있게도 꾸몄네. 회사에 출근할 때랑은 다른 모습을 보니까 색다르네. 
 여자는 안중에도 없고 다이치에만 신경이 쏠리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쿠로. 아마 자신이 아는 사람은 다이치 뿐이니까라고 믿었다. 닫혀있던 문틈으로 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뒤로도 몇 번 그 여자와 만나는 듯 했다. 하지만 만나고 들어오는 날마다 표정이 좋은 적은 없었다. 별다른 말없이 관심 없는 척,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도 무관심한 채 보내던 어느 날.
 그 여자가 다이치의 집에 온다고 한다. 벌써 상견례 하는 건가. 빠르네.

 “쿠로오씨. 오늘 중요한 분이 오신다고 하니까 오늘은 방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

 그렇지..약혼자니까 중요한 사람이지.. 그러나 ‘중요한 분’ 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마음을 쿵 하고 가라앉혀 놓았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거리를 두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하루 종일 집안이 떠들썩했다.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왔다. 그 여자가.
 다이치가 지시해둔 일 때문에 다이치의 방에서 서랍을 뒤적이고 있던 쿠로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벌써 식사 끝났...?”
 “여기서 뭐하는 거죠?”

 그 여자다. 흰 꽃, 아니 얼음꽃 같은 인상이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아 사와무라씨께서 지시하ㅅ...”
 “당신 스파이인가요? 한낱 경호원 따위가 왜 이곳에 들어와있냐구요.”

 쿠로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한낱 경호원 따위가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전 다만 사와무라씨께서 찾아달라고 부탁하신 서류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여자의 옆을 지나가는 쿠로의 뒷모습을 흘겨보는 여자.

 “이봐요. 당신, 그때 카페에서 있었죠?”
 “...”
 “전속경호원인 주제에 뭐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당신 마치 다이치씨를 뺏기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아보이네요.”

 뺏기기 싫다고? 내가? 아아, 그래.
 문틈으로 비집어 들어오는 빛만을 보다가 드디어 문을 열고 온 몸으로 빛을 쬔다.

 “맞아. 뺏기기 싫어.”

 뒤돌아서 특유의 능글거림을 담은 눈빛으로 보며 여자를 조롱하는 듯 입꼬리를 만든다.

 “지금 나한테 반말―”
 “난 전속경호원으로써 사와무라를 알게 된지 2달이 넘어가고 있어요. 그러는 당신은 사와무라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잘난 척이지? 겨우 2주도 안된 주제에.”
 “하!”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여자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와무라가 만나자마자 당신에게 하는 말이 뭐죠?”
 “제가 대답해야할 이유는―”
 “회장님과 사모님은 잘 지내시나요?....라고 하죠?”
 “....제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죠.”
 “네 그럴 수 있죠. 근데 제게는 저에 대해 물어보거든요.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
 “.....”
 “당신 같은 사람을 사와무라 옆에 붙어있게 할 수 없어.”
 “당신이 무슨 수로?”
 “흰 얼음꽃이 아무리 하얀 장미인 척해도 만져보면 차가운 얼음이라는 건 금방 들키거든.”

 여자에게 매몰찬 눈을 남긴 채 뒤돌아 문을 열었다.

 “ㅅ,사와무라...”

 쿠로의 말에 화들짝 놀라 쿠로오를 밀어내고 사르르 웃음을 지어내는 여자.

 “어머, 제가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나요? 죄송해요. 아하하,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여자의 웃음에 복수라도 하듯 똑같이 사르르 웃음을 띄우는 다이치.

 “아뇨. 다시 오실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도요. 짐은 그쪽 경호원을 통해 차에 실어두었습니다. 제가 배웅 해드릴까요? 아니면 스스로 가시겠어요?”

 붉으락풀그락해진 여자가 화가 묻은 발걸음을 이끌고 나갔다.

 “ㅇ..언제부터 듣고있었어..?”
 “나 뺏기기 싫다며.”
 “아..!하씨...”

 쿠로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물론 다른 원인으로.

 “나한테는 한번도 이런 모습 보여준 적 없었으면서.”
 “ㄱ,그건..!...그나저나 멋대로 약혼 파기해도 되는거야? 회장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
 “아―어차피 오늘 집에 부른 이유가 약혼 파기하겠다고 모두에게 말하기 위해서였어. 잘됐지 뭐.”
 “집안이 또 난리 나겠네. 나 잘리는 건 아닌가 몰라. 어휴”

 이 날 이후로 두 사람은 연인사이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쭉 이어져가는가 싶더니...

 “여보세여....”

 잠에 취해 잔뜩 낮게 가라앉은 쿠로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울려퍼진다.

 “아 저...안녕하세요! 또다시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아~스가아아아~~!! 전화걸지 말라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근데 전화기 너머에서 취한 듯한 다이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착각인가.

 “저..저번에도 같은 일로 전화드렸던 다이치 친구입니다만...”
 “거기 어디죠.”

 후...전이랑 똑같은 일인데 느낌이 완전 다르네. 만나기만 해. 


 “사와무라. 나왔어. 눈떠봐.”
 “음? 아 쿠로~으하핳”

 얼마나 마신건지 저를 보고 눈이 풀린 채 헤실헤실 웃는다.

 “일어나. 집에 가자.”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던 다이치의 몸이 기울어진다.

 “야..!”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흐아..쿠로~”

 하며 쿠로오에게 안긴 것이 아닐까. 아마 이날 밤은 둘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밤이었을 것이다.


 “.........”
 “말을 해봐.”
 “............”

 어제 그렇게 잔뜩 취해서 쿠로에게 안긴 다이치는 혼나는 중이다.

 “어제 왜 말도 없이 늦게까지 술 마신거야.”
 “....미안....”
 “몇 시부터 마셨어.”
 “10시...”
 “10시? 그때 내가 퇴근 하는 시간이잖아. 일부러 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나 보내고 술 마시러 간거야?”
 “....그럼 넌 어제 술 취한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그,그건...지금 말돌리지 마.”
 “나한테 혼낼 자격 없어. 내 의사는 하나도 없이 너 혼자 일방적으로 한 거잖아!!”
 “지금 반성의 기미가 하나도 안 보인다?”
 “너야말로 어젯밤에 대한 반성의 기미가 안 보인다?”
 “정말 이럴래?”

 다이치는 홱 돌아서 출근준비를 하러 방을 나가버렸다.


 하루 종일 둘은 대화 한마디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만 수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음날이 될 때까지 핸드폰 한번 울리지 않았다.

 ‘아..어제는 내가 사과를 했어야 했나...쿠로 이 자식은 뭘 잘했다고 아무 연락도 없는 거야..오늘 아침에 만나면 사과부터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쿠로오가 아닌 전(前)담당 경호원이 쿠로오 대신 서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부상로 인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 점 죄송합니다. 다시 복귀하게 된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몸은 깨끗하게 나으셨나요?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쿠로오씨는 어디 가셨나요?”
 “아 제 부재로 인해 3개월간 쿠로오 테츠로 군이 제 자리를 임시로 메워주었습니다. 어제로써 임시전속경호원 기한이 끝나고 제가 복귀한 것입니다.”
 “예?! 어제가 마지막이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아 쿠로오군이 말씀 드리지 않던가요?”

 어제가 마지막이었으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얼굴도 안보고 가버린거야?

 “그럼 쿠로오씨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전에는 제 2경호팀 팀장이었으니까 아마 그 직위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알려줘서 고마워요. 출발하죠.”


*



 쿠로오와 얼굴은커녕 연락도 끊긴지 3일째. 왜 아무 연락이 없지? 볼장 다봤으니 이제 끝이라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수어번의 고민 끝에 조심스레 문자를 넣어본다.

 [쿠로]
 [바빠]

 이 새X가.


 둘의 싸움은 더욱 불이 붙어 결국 서로 얼굴을 못 본지 어언 일주일째. 다이치는 실연을 당한 얼굴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끝이 나는 걸까, 하고 죽을상을 하던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
 “나 안보고 싶었어?”
 “안보고 싶었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정말? 진짜로? 실망인데~ 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
 “미안해. 지금 잠깐 밖으로 나올래?”


 집 건물을 나오자 쿠로오가 정장을 빼입고 서있다.
 보고싶은 얼굴을 보자 미소가 절로 나왔지만 애써 화가 나있는척 표정관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사와무라 다이치씨의 전속경호원을 맡게 된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을 끝으로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다이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쿠로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너한테 바로 연락했어야했는데 전속경호원 되려고 절차 밟느라 늦었어.”
 “그렇다고 일주일씩이나 걸리냐?!”
 “오야? 원래 전속경호원 되려면 최소 3개월 특별훈련을 받아야해. 근데 임시경호를 한 일도 있고 내가 경호 팀장이어서 특별히 일주일 만에 온 거야. 나 기특하지?”
 “나쁜놈...”
 “하하, 그땐 내가 미안했어. 너에 대한 충분한 배려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 늦게 온 것도 미안해.”
 “아냐 나도 미안해. 다시 만나면 이 말부터 하려고 했어. 미안해.”

 서로의 눈을 맞추며 바라보던 둘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에서 포개어진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소설] 코로  (0) 2016.12.09
[소설] Naru  (0) 2016.12.09



신혼여행 이틀 차 아침, 쿠로오의 이야기
w.코로
@HQ_koro





 리마인드 웨딩이라던지, 결혼기념일 같은 건 왜 챙기는 걸까? 돈도 돈이고 시간도 시간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라고 하더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쿠로오는 콧방귀를 꼈다. 결혼을 안해서 그런다고? 

 “…….”

 정말 그래서였을까? 쿠로오는 눈앞으로 보이는 연인의 잠든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분명 결혼하기 전에도 두 사람은 숱한 밤을 보내왔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뜰 때 서로가 곁에 있다는 걸 수없이 확인했더랬다. 그래왔었는데, 지금 이렇게 이질적인 느낌은 처음이었다. 결혼은 이런 건가? 신혼여행이라는 게 이런 거야? 쿠로오는 생소한 기분이 신기했다. 평생 한 번 있을 신혼여행을 기억하기 위해 예약한 좋은 호텔에 누워있는 것도 신기했고, 좋은 침대, 좋은 이불 속에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전라의 연인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온 몸에 제가 남긴 키스마크를 달고 깊게 잠들어있는 연인 또한 매일매일을 봐왔는데 어째서일까. 함께 하고 있는 시간과 장소만 다를 뿐, 모든 것이 같은데 왜 이리도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네. 하얀 이불 속 머리만 쏙 내놓은 연인의 부스스한 머리 위로 이불만큼이나 새하얀 햇살이 닿아 있었다. 쿠로오는 그 모습을 멍하게 보다 이내 감탄했다. 와. 내가 정말 결혼 한 거야? 다이치랑?

 “이게 꿈이야, 생시야…?”

 속삭이듯 중얼거린 쿠로오는 손을 들어 눈가를 비벼보기도 하고, 연인인 사와무라의 얼굴을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만지기만 하면 제가 아쉬우니 콧잔등 위에도 한 번, 이마에도 한 번, 입술에도 한 번 입을 맞춰봤다. 그 움직임에 뒤척이던 사와무라의 눈이 작게 뜨인다. 으음…….

 “…쿠로오…?”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부스럭거리더니 이내 저를 끌어안아오는 사와무라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쿠로오는 제 등을 두드리면서 고개를 들고 입술을 내밀어오는 연인의 움직임에 맞춰 입을 몇 번이고 맞춰냈다. 잠결이지만, 습관처럼 품으로 파고드는 것도 항상 보아오던 모습이다. 쪽, 쪽, 부드럽게 떨어지는 소리가 멈추고 품으로 파고든 뒤 다시 잠이 드는 연인의 등을 토닥이던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까슬한 머리카락 위로 고개를 내려 부볐다. 쿠로오라니. 이제 ‘사와무라 테츠로’가 되었는데 이름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잠결이라 예전에 부르던 그대로 부른 걸 수도 있고…. 

 “사와무라 테츠로…. 어감 괜찮네. 생각보다.”

 쿠로오는 조금 생소해진 제 이름을 조용히 읊조려보았다. 동성혼이다보니 누구의 성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먼 미래라고 생각하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그게 지금에 이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쿠로오는 제 아버지보다 더 단호한 사와무라의 아버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라도 사와무라의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새 아들처럼 생각해주십시오, 아버님. 사와무라와 나란히 앉아 무릎을 꿇었던 그 때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어이 받은 허락 끝에 사와무라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을 만큼 긴장해있던 탓이리라. 주변에선 다들 사와무라가 쿠로오의 성을 따를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인지, 놀란 표정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고 말이다. 넣는 쪽 성을 꼭 따를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당연히 쿠로오의 성을 따를 것이라는 전체적인 분위기에 제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하고 난처해하던 사와무라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후회가 없다. 부모님이 조금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가까이 사는 것으로 내심 마음의 합의를 보신 듯 하다. 결혼, 결혼이라…. 

 사와무라의 등을 토닥이던 쿠로오는 자연스럽게 연인의 몸 곳곳에 보이는, 제가 남긴 자국들을 발견했다. 결혼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신혼의 힘? 평소라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돈지랄의 힘? 평소보다 예민해진 움직임이나 한층 높아진 신음, 갈망하는 눈동자, 자꾸만 안아달라 조르던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사와무라는 저보다 더 빨리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평소와 달랐던 사와무라만큼이나 쿠로오의 가슴 속엔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갑자기 치솟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잠든 연인을 강하게 끌어안은 쿠로오가 몇 번이고 입술에 닿는 정수리 위로 입을 맞춰냈다. 발가락이 간질거려와 절로 발등이 굽어들었고, 벅차오르는 감정들에 의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 소리에 깨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이제 진짜 부부구나…. 응, 다이치.” 

 하나의 성을 가진, 부부. 이별에 두려워하지 않고, 세간의 시선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법적 울타리에 들어온, 부부. 물론 결혼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헤치고 나가야 할 세간의 시선이라던가, 이별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주변인들이 결국 제 편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 같아 쿠로오는 급히 차오르는 숨을 자그맣게 뱉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쓰레기장의 결전을 위해 고등학교 삼학년 때 주장 대 주장으로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마등처럼 쿠로오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힘든 것들을 이겨내던 때가 있었다. 서로 의지하며 어려움을 이겨내자던 마음이 약해지던 때가 있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외면당해 상처가 가득했던 날, 한계까지 벌어진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로에게마저 상처를 주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 주고, 돌아서 눈물을 흘렸고, 등을 돌린 것을 후회 했고, 그것을 경험 삼아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감정이 격해져 부들거리는 몸 때문에 행여나 연인이 깨어날까, 쿠로오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고개를 위로 들어 참아낸 덕분에 조금 작아진 숨을 터뜨려본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려 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연인을 거세게 끌어안게 되더라. 거센 몸짓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마주 안아오는 온기가 있었다. 쿠로오는 그 온기에 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테츠로…….”
 “다이치.”

 갑자기 옥죄어오는 느낌에 인상을 쓰면서도 잠에서 깨지 않는 연인을 보며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일어나면 쪽팔릴 거야. 코를 작게 훌쩍인 쿠로오는 한참 사와무라를 내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겉잡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점차 사그라드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다이치.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러움에 몸을 뒤트는 연인의 귓가에 몇 번 입을 맞춘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잘 살자. 기어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쿠로오가 잠시 말을 멈추고 말았다. 멈췄던 말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쿠로오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인 것도 같았고, 부들거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인 것도 같았다. 잠시 후, 후, 하고 심호흡을 하던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

 “그 누구보다 잘 살자, 우리.”
 “…….”
 “힘들었던 것만큼, 남들 보란 듯이 잘 살자.”
 “…….”
 “괜히 안 좋게 생각했네, 하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잘 살자.”
 “……사랑해.”
 “…!”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온기가 닿았다. 저를 끌어안은 연인의 팔이, 마찬가지로 부스스해있을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깬 걸까? 고개를 움직여 얼굴을 살피니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사와무라다.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깨웠어?”
 “…아니, 자고 있어.”

 자고 있기는…. 쿠로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머리를 굴리다 이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일어날까?”
 “…아니, 더 잘거야.”
 “……미안해.”
 “그 말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말 해줘. 그 말, 들려줘.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연인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듣고 싶은 말, 해줘. 응? 테츠로. 제 이름을 부르며, 꾹 다물어낸 제 입술 위로 장난스레 입을 맞춘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던 딱딱해진 마음이, 연인의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입맞춤에 몽글몽글, 부드럽게 변하는 게 느껴진다. 마음 속 움직임에 사와무라의 허리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았다 놓은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해.”
 “그래, 우리는 잘 살거야.”
 “사랑해, 다이치.”
 “누구보다 더 잘 살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한참 사랑을 주고받던 사와무라가 말을 이었다. 다시 자자. 햇살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한 이불이 너무 기분 좋아. 여유 가득한 네 냄새도 너무 좋고, 그냥 지금 다 좋아. 우리는 아직 이 여유를 더 즐길 수 있고, 일어나면 뭘 할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도 해야 해. 그렇지, 테츠로? 한숨 더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좀 더 황홀한 기분으로 신혼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거야. 조금 이따 만나. 눈 뜨면 사랑한다고 인사 해주기. 연인의 달래기 기술은 세계 최고일 것이라 생각하며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감긴 눈 위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우리는 잘 살거야…. 마지막까지 저를 달래기 위해 웅얼거리다 다시 잠든 연인을 한참 바라보던 쿠로오도 이내 눈을 감아냈다. 연인의 말대로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로운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소설] 쵸코  (0) 2016.12.09
[소설] Naru  (0) 2016.12.09



Twinkle Star
w.Naru
@naru_duks





 차창 밖으로 적막한 풍경이 지나간다. 가을걷이가 끝나 기력이 쇠한 땅은 겨우내 싹을 틔울 준비를 하며 조용히 잠들었다. 광활한 논밭 너머에는 차창에 비친 내가 있다. 하늘 위로 치솟을 대로 치솟은 머리카락과, 눈 밑에 드리워진 검은 그늘, 그리고 조금은 핼쑥해 보이는 내 모습은 그야말로 산송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근 이틀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틀 전,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부활동을 마치고 조금은 지친 몸으로 귀가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께서 내 앞으로 엽서가 왔다면서 날 부르셨다.

 “쿠로오, 네 앞으로 온 엽서야”
 “엽서요?”
 “응, 그 미야기 친구한테서 온 것 같던데?”

 사와무라다. 나는 미야기 친구라는 말에 반색을 했다. 사와무라와 나는 친구, 아니 친구라기보다는 연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쿄와 미야기는 함부로 연애를 시도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도쿄와 미야기는 거리상으로 꽤 많이 떨어져 있는 지역인지라,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와 사와무라는 모두 고3인데다, 나나 사와무라나 모두 대학 진학을 생각하고 있는 지라, 서로 만나기는 더욱 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라인을 통해 연락을 취하면서, 입시가 끝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와무라와의 연락이 끊겼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와무라가 바쁜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사와무라는 대학 입시를 치르는 입장이니 연락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또 사와무라가 여유가 있다면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사와무라에게 일절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사와무라로부터 한 장의 엽서가 온 것이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엽서를 집어서 엽서에 적힌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



 제목을 읽자마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동공이 흔들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엽서의 나머지 부분을 다 읽자마자 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사와무라에게 필사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것을 봐선 아직 휴대전화는 살아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건조한 신호음이 귓가에 계속 맴돌면서 온 몸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나왔다. 휴대전화 너머로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발... 누구라도 좋아... 아무나 전화 좀 받아 줘... 그리고 말해 줘....

 사와무라 다이치는 죽지 않았다고 말해 줘.


*



 나는 부고 엽서를 받은 이런 상황을, 사와무라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미야기로 향하는 기차에 탄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분명 이건 사와무라의 장난일 것이다. 제발 장난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혹시 모른다. 미야기에 도착했을 때 사와무라가 “미안, 깜짝 놀랐지?”라고 말하면서 마중을 나와 있을지는. 비록 사와무라가 마중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나는 미야기에서 사와무라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사와무라는 그 어떤 장난도 치지 않았다. 내가 사와무라를 만난 곳은 작은 납골당이었다. 작은 상자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그저 상자 옆에 놓인 사진 속의 사와무라만이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거의 도망치듯이 납골당을 빠져나왔다. 사진 속의 사와무라를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사와무라와 조금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동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나는 찬찬히 엽서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교통사고. 길을 걷다 트럭에 받힌 모양이었다. 내가 사와무라와 소식이 끊길 때쯤은 사와무라가 이미 사고를 당한 뒤였다. 장례는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지냈다고 한다. 세상은 야속하다. 한번만 더, 조금만 더 사와무라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욕심일까? 사와무라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다. 분명 저것도 사와무라의 지독한 장난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분명히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차 안에 앉아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고 사와무라를 떠올렸다.


*



 눈을 떴다. 아니, 정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고적한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조그마한 집들이 즐비해 있는 걸 봐서, 도심 외곽의 주택가인 것 같았다. 정확히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수한 집들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해질녘 거리는 적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고요한 거리의 분위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런 목적 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이곳에서 날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고 싶었다. 걷다 보면 복잡하게 교차하는 감정의 선들이 정리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그렇게 똑같은 곳을 몇 바퀴 정도 돌았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소리가 들린 곳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며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저기 울고 있는 사람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걸까?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 걸까?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소년이 분필을 잡고 길을 막고 있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벽에는 분필로 그려진 사이좋은 두 소년이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도 잠시, 소년은 한쪽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만다. 그러고는 그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괜찮니?”

 소년의 울음이 멈추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랐던 모양인지 소년은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바들바들 몸을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테츠...로?”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소년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눈앞에서 훌쩍거리는 소년은 젖살이 남아 있는 둥글둥글한 얼굴과,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앳된 목소리를 빼면 내가 아는 사와무라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죽었을 텐데? 소년은 놀란 내 모습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네가 놀라는 거야? 정작 놀란 건 난데...”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 고였다. 소년은 소매로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어 내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돌아와줘서 고마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소년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내 눈앞에 사와무라가 있는데... 소년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어린애가 되다니... 다리에 매달린 소년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소년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근데 테츠는 왜 갑자기 아저씨가 된거야?”

 소년 입장에서는 고등학생이 아저씨로 보일 수도 있는건가? 아니면, 초췌한 내 모습이 그렇게 늙어 보이는 건가? 게다가 내가 아저씨가 된 게 아니라, 사와무라가 어려진 것일 텐데? 나는 순간적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이 소년이 사와무라라면 고등학생인 내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리가 없을 텐데?

 “잠깐만, 먼저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넌 대체 누구야?”

 나는 소년에게 쏘아붙이듯이 질문을 던졌다. 눈 앞에 있는 것은 사와무라를 닮은 소년이다. 어쩌면 진짜 사와무라 일수도 있는... 소년은 얼굴을 갸우뚱거리며 왜 새삼스럽게 이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테츠, 설마 아저씨가 되면서 잊어버린 거야?”

 소년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소년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 고개를 떨구고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테츠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명...테츠는 죽었는데...”
 “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쓰다듬고 있던 소년의 머리채를 잡고야 말았다. 살짝 잡아당겨진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소년은 흠칫하며 입 밖으로 고통을 내뱉고야 말았다. 소년의 아픔의 신호에 다시 한 번 놀란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아무리 놀랐다고 하지만, 작은 소년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미...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로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 소년이 떠나가버린다 해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소년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내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인의 얼굴을 한 소년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죄책감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테츠가 죽었다니? 대체 무슨 말이지? 분명 죽은 사람은 사와무라 다이치.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일 텐데?

 “테츠가 죽었다니, 무슨 말이야?”

 미안한 감정을 뒤로 한 채 나는 소년에게 다시 한 번 쏘아붙였다.

 “교통사고.”
 “뭐?”
 “나랑 공놀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잖아.”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소년은 자신과 ‘테츠’에게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었다. 소년의 이름은 ‘사와무라 다이치’ 그리고 ‘테츠’라고 부르는 ‘쿠로오 테츠로’와는 친한 친구 사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소년은 테츠가 자신과 공놀이를 하다 공이 찻길로 굴러가 공을 주우러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하지만 테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와무라 다이치, 눈앞에 있는 소년은 사와무라 다이치다.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쿠로오 테츠로가 죽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끝낸 소년은 나의 자초지종에 대해 물어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부터 해서, 트럭에 치였는데 아프지는 않았냐는 둥, 나는 소년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겠다고 잡아떼기에는 조금 미안한 감이 머지않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지만, 난 네가 말하는 테츠가 아닌 것 같아.”

 나를 부정했다.

 “응? 하지만, 닭벼슬이 있는 걸?”
 “닭벼슬이 있다고 다 테츠는 아니잖아?”
 “그런가?”
 “그래, 난 테츠가 아니야. 미안하지만 더 볼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난 이만 간다.”

 나는 다소 매정하게 소년에게서 등을 돌렸다. 소년은 나를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저기...정말로 테츠... 아니...에요?”
 “응...”

 소년은 질문을 하면서도 조금 주저하는 듯 했다. 혹시나 내가 테츠가 아니라면 소년은 나에게 크나큰 실례를 저지른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소년의 눈을 피하며 어쩡쩡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소년은 나의 애매한 대답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어...그럼...저기...아저씨?”
 “아저씨 아니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음...그냥 지나가던 아저씨라고 해둘까?”
 “그거 말고, 별아저씨는 어때요?”

 무슨 해괴망측한 별명인지는 몰라도, 나를 ‘테츠’로 각인시키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처사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별아저씨인지 물어 봐도 될까?”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어요.”
 “멋대로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말아 줄래?”
 “하지만 아저씨, 아저씨랑 있으면 꼭 테츠랑 함께 있는 것 같은 걸요?”
 “......”

 나는 손가락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지? 그 죽은 테츠는 지금 저 멀리서 너를 보고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별이 안 보이는걸요?”
 “그렇다면 오늘 같이 친구를 만나러 갈까?”
 “테츠요?”
 “아니, 나는 내 친구를 만날 거야.”
 “아저씨도 별이 된 친구가 있어요?”
 “......”

 나는 소년의 질문에 끝내 답을 해 주지 못했다. 내 눈 앞에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한 소년이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저 하늘 위에서도 사와무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날이 해가 저물고 소년과 나는 외곽의 언덕진 곳으로 갔다. 주황색 노을은 어느새 분홍빛으로 바뀌는 듯싶더니 이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시간이 지나자 보랏빛 하늘도 점점 빛을 잃어 어느새 완벽한 어둠빛으로 가득 찼다. 그 때, 조그만 빛줄기가 어둠을 비집고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낸 빛은 점점 많아지는 듯싶더니, 삽시간에 은은한 빛으로 온 하늘을 뒤덮었다. 소년은 무수하게 박힌 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테츠는 어디 있을까요?”
 “테츠는 네 소중한 친구라고 했었나?”
 “네.”
 “그렇다면 저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그게 테츠일거야.”

 사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테츠가 사와무라의 정말 소중한 친구라면, 사와무라의 눈에 가장 빛나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밤하늘에서 빛을 내는 친구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저 하늘위의 별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있다. 만약 사와무라가 저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면, 지금 이 소년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물론.”

 돌연 사와무라의 굵직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지금 여기 ‘사와무라’는 없다. 환청인가? 아니다. 분명 사와무라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 있어? 어디 있는 거야?

 “여기야.”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소년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와무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와무라...”

 나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와무라에게 달려들어 사와무라를 꽉 끌어안았다.

 “아저씨?”
 “미안해...사와무라. 넌 계속 옆에 있었는데, 자꾸 피하기만 하고...”
 “아저씨...”
 “미안하다...나의 별...”
 “......”

 나는 사와무라를 안고 흐느꼈다. 사와무라는 그런 나를 끌어안았다. 사와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사와무라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사와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이야, 이제라도 날 찾아 줘서.”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고 엽서를 받은 순간부터 나는 죽은 사와무라를 부정하며 환상 속에 살아 있는 다이치를 좇아왔다. 하지만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멍해있을 때, 어딘가에서 구슬픈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음악소리가 들려오자 사와무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테츠, 밤도 늦었는데 이젠 작별인사를 해야겠지?”
 “......”
 “걱정 마, 내가 말했잖아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

 나는 사와무라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에 사와무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럼, 안녕.”


*



 눈을 떴다. 출발할 때의 주홍빛 노을은 어느덧 새까만 밤하늘이 되어 기차 안의 나의 모습을 좀 더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차 안에는 곧 동경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서서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기차역 밖에서는 동경의 쓸쓸한 밤공기가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구석구석에는 남몰래 빛을 내는 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어요.”

 문득 사와무라의 말이 떠올랐다. 사와무라는 나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꼴사납다고 날 비웃었을까? 아니, 사와무라는 모든 답을 해 줬다. 나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동경의 밤은 칠흑의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어두운 밤거리를 향해 발을 디뎠다. 어둠빛 하늘 속에 박힌 별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16 가운데생일 합작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몽쉘  (0) 2016.12.09
[소설] 미남  (0) 2016.12.09
[소설] 시즈쿠  (0) 2016.12.09
[소설] 쵸코  (0) 2016.12.09
[소설] 코로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라일  (0) 2016.12.09
[일러스트] 모이뽕  (0) 2016.12.09
[일러스트] 큐삽  (0) 2016.12.09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꿀돼  (0) 2016.12.09
[일러스트] 모이뽕  (0) 2016.12.09
[일러스트] 큐삽  (0) 2016.12.09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꿀돼  (0) 2016.12.09
[일러스트] 라일  (0) 2016.12.09
[일러스트] 큐삽  (0) 2016.12.09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라일  (0) 2016.12.09
[일러스트] 모이뽕  (0) 2016.12.09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만화] 는개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모이뽕  (0) 2016.12.09
[일러스트] 큐삽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만화] 는개  (0) 2016.12.09
[만화] 망빙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큐삽  (0) 2016.12.09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만화] 는개  (0) 2016.12.09
[만화] 망빙  (0) 2016.12.09
[만화] 볼보루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키하츠  (0) 2016.12.09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만화] 망빙  (0) 2016.12.09
[만화] 볼보루  (0) 2016.12.09
[만화] 정체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러스트] 和坂 柔  (0) 2016.12.09
[만화] 는개  (0) 2016.12.09
[만화] 볼보루  (0) 2016.12.09
[만화] 정체  (0) 2016.12.09
[만화] 휴이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는개  (0) 2016.12.09
[만화] 망빙  (0) 2016.12.09
[만화] 정체  (0) 2016.12.09
[만화] 휴이  (0) 2016.12.09
[만화] カネダ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망빙  (0) 2016.12.09
[만화] 볼보루  (0) 2016.12.09
[만화] 휴이  (0) 2016.12.09
[만화] カネダ  (0) 2016.12.09
[漫画] 는개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볼보루  (0) 2016.12.09
[만화] 정체  (0) 2016.12.09
[만화] カネダ  (0) 2016.12.09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정체  (0) 2016.12.09
[만화] 휴이  (0) 2016.12.09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휴이  (0) 2016.12.09
[만화] カネダ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漫画] 정체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 カネダ  (0) 2016.12.09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漫画] 정체  (0) 2016.12.09
[漫画] 휴이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정체  (0) 2016.12.09
[漫画] 휴이  (0) 2016.12.09
[漫画] カネダ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漫画] 휴이  (0) 2016.12.09
[漫画] カネダ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漫画] 정체  (0) 2016.12.09
[漫画] カネダ  (0) 2016.12.09






'16 가운데생일 합작 > 일러스트&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漫画] 는개  (0) 2016.12.09
[漫画] 망빙  (0) 2016.12.09
[漫画] 볼보루  (0) 2016.12.09
[漫画] 정체  (0) 2016.12.09
[漫画] 휴이  (0) 2016.12.09



쿠로다이 여름 꾸금 합작 모바일 페이지입니다.


본 합작은 성인 수위의 작품들을 모아 진행하였으며 그에 따라 간단한 성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보실 수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이곳<<의 ISBN 제일 끝 7자리입니다.


피드백은 연성러의 힘!♥

즐겁게 보셨다면 참여하신 분들께 애정 담긴 피드백을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Recent posts